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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일이다. 수업 시간은 언제나 내게 길고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재미도 없었고 집중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 맨 뒤로 휴지를 버리러 갔다. 숨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하고 엄격한 시간, 오직 선생님의 목소리만 공간을 가득 메우는 시간, 공기도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의 공간에서 나는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뒤로 갔다.
모두 앞을 보고 있을 때 뒤로 걸어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참았던 숨을 갑자기 쉴 수 있었다. 약간의 불안감과 두려움, 그러나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안고 뒤로 향했다.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 휴지는 휴지통에 버리라는 가르침을 실천 중이니까 당당하게 걸어갔다. 휴지를 버리고 턴을 돌아 자리로 오는 시간이 얼마나 짧고 아쉬웠던지 지금도 그 느낌을 세포가 기억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급 토론회에서 그 얘기가 나왔다. 반장과 부반장이 진행하는 주간회의 시간에 누군가 안건으로 ‘수업 시간에 휴지를 버리러 가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제안을 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현장에 내가 있었다. 내 얘기라는 걸 단번에 알았지만 그 친구는 나를 배려하느라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나도 조용히 찬성표를 던지고 그 이후로는 수업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자제했다.
이런 많은 순간을 지나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규격화된 어떤 곳에 소속되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는 과정이었다. 사회란 이런 것이다. 서로를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질서를 함께 세우고,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배우고 성장하며 갈 바를 알게 된다. 한편으로는 책임을 져야 하는 답답한 지경이 되는 일이지만, 벗어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어떤 단계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지난다. 통과점이 변곡점이다. 휴지를 버리러 가는 자유를 잃었지만 학급의 권유를 받아들인 나를 스스로 칭찬해 주었다.
강아지의 발견
담임 선생님들은 성적표에 ‘주의가 산만하다’라고 항상 썼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참을성은 없고 혼자 공상하는 시간만 많았다. 처음에는 정확한 뜻을 알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뭔가 내가 잘못하고 있고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평가라는 것쯤은 눈치로 알았다. 다행히 부모님은 그에 대해 꾸지람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 집중력과 지구력이 부족한 아이라는 열등감과 함께 살았다.
나는 요즘 집앞 산에 자주 오른다. 겨우내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보며 저런 데서 정말 잎이 다시 나올까 볼 때마다 의심스러웠는데 어제는 이파리 정도가 아니라 하루 만에 꽃이 핀 것을 발견했다. 사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매번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함께 산책하는 동반자는 이런 내가 강아지 같다고 한다. 뭐 그렇게 볼 것이 많고 놀랄 일도 많은지 도무지 앞으로 직진해서 갈 수가 없단다. 하지만 가운데 길로 걷지 않고 길과 풀숲의 경계로 가다 보면 늘 많은 일이 일어난다. 자석처럼 나는 늘 거기 가있다. 그런 길을 걷는 내가 좋다. 평생 가운데 길만 걸어온 이 사람도 어느새 그런 산책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자유롭다. 산만하고 지구력이 떨어지는 열등감 대신, 지치지 않는 호기심이 내 삶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발견하게 도와주었다. 지금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를 즐기는 마음이 마르지 않는다. 집중해서 사랑할 것을 만났을 때 밤을 새워 산을 넘는 희열을 수년간 경험할 만큼 집중력과 지구력이 내 안에도 있음을 알았다. 세상으로 향한 더듬이가 좀 다르게 생겼을 뿐 매우 정상적이며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여기서부터가 질문이다. 잠시 선생님의 칠판으로 돌아가보자.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모두가 바라보던 칠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향해 나란히 앉아 있었을까? 그 이후로도, 어쩌면 지금까지 계속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앞면의 정체는 무엇인가? 서로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일렬로 서서 달려온 우리는 칠판에 집중할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교실이, 매체가, 나를 가르친 모든 공간이, 혹시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법을 배우는 공장은 아니었을까?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능력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능력은 왜 우려스러운가? 아직 발현되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왜 없는 것인가? 앞사람의 뒤를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모두 계단을 오르고 있다. 왜 올라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계속 따라간다. 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칠판의 앞면
순위로 정해진 세상의 질서는 미래에 집착한다. 하지만 미래는 어느 시점이며,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더 좋은 학교와 덜 좋은 학교가 있고 더 좋은 직장과 직업, 덜 좋은 직장과 직업이 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위 또는 아래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결정된다. 학교를 졸업하면 순위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만 직장에서 좀 더 혹독한 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경쟁해서 올라가야 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회사의 조직도다.
입시는 어느새 문화가 되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편의점이나 차에서 김밥과 햄버거로 끼니를 해결하는 하루가 피할 수 없는 길처럼 강요된다. 가끔은 불이 나도록 매운 떡볶이를 먹어줘야 스트레스가 날아갈 것 같다. 아이들은 잠도 줄여가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투자하는 중이다. 미래는 내일이 되어야 올 것 같지만, 내일이 되면 새로운 내일이 오고 미래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미래는 우리 삶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허구다.
행복의 기준은 사회가 정해 놓았지만 그 기준대로 따라가서 정말 행복해졌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시대가 변해도 칠판의 앞면이 만들어낸 공식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오늘을 묻지 않는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높은 명예, 더 높은 사회적 위치가 나의 오늘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만들고 순응하며 사회적 위계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우리 삶의 서사는 성공을 향해 가는 여정이 되었다. 칠판의 앞면은 여기에 쓰임이 있다.
하지만 미래로 향하던 우리의 여행은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어느 경계 지점, 극단의 지점까지 다다랐다. 모든 것이 연결된 환경은 예측이 어려운 복잡한 세상을 만들었고 우리는 이것을 생명체, 살아있는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연결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거대한 생명체로 모든 작은 작용이 전체에 영향을 준다.
여기서는 그 어떤 조직도, 관계도, 시스템도 스스로 유기체가 되어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세상의 진화와 파괴가 동시에 가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물리적 생산 능력이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하는 동안, 세상의 모든 관계는 끊어졌다. 이웃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끊어진 인류 생태계 속에 나 자신이 있다. 여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더 빠른 걸음으로 앞을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변화를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며, 가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며, 답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칠판 대신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들은(우리는) 대학에 들어가도 미래를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하룻밤 새 책 한권을 번역하고, 법률문서를 만들고, 수십 년간 습득해야만 하는 것들을 이미 전구에 전력이 흐르듯 단번에 알고 있다. 우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가운데, 세상의 노동력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게 될 것이다. 어른들은 지금의 공부가 곧 무용지물이 될 것을 알고 있어도, 시대의 흐름이 빨라진다고 현재의 시스템을 유연하게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체득해온 관성이란 그런 것이며, 이익을 중심으로 한 세상의 이해관계는 그런 것이며,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평가가 더 중요한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은 실패의 확률이 높은 길이므로 지금 여기, 이대로가 좋다.
연결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가치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만 이에 반응하는 것은 아직 우리의 촉각뿐이다. 우리는 들을 시간이 없고 멈출 시간이 없으며 돌아볼 용기가 없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좋은 대학을 가고 승진을 하면 타인이 축하할 일이라고 평가해 주고, 그래서 나도 자랑스럽다. 행복은 내 안에 있지 않고 타인의 평가안에 있다. 꼭 조직도 안에 있지 않더라도, 나처럼 독립형 피라미드에 입주한 사람도, 어디에 있든 사회관계 안에 있다면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행복은 허구다.
존재적 빈곤
우리는 부자로 태어나 가난하게 죽는다. 유일한 존재인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 저마다의 사랑스러운 것들에 주목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 자라나고 죽을 때까지 기계처럼 착착 앞으로 간다.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 세워야 할 목표, 만들어야 할 가치, 모든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본성을 스스로, 그리고 서로 바라봐 주며,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우리 사회는 낭비라고 부른다. 돈으로 계량화되거나 사회, 경제, 문화적 자본으로 환산될 수 없는 노력은 낭비다.
나는 산책할 때 온통 초록의 움트는 자연을 들여다보고 감탄할 수 있다. 동반자는 100미터도 더 떨어진 곳에서 산책 중인 남의 집 강아지도 볼 수 있다. 누구는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고 누구는 보이는 대로 쓰고 노래할 수 있으며 누구는 왜 저렇게 보이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누구는 빠르게 이해하고 누구는 대상의 장점을 볼 수 있다. 누구는 말을 잘하고 누구는 가만히 생각할 수 있다. 누구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을 가졌으며 누구는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을 가졌으며 누구는 돕는 기쁨을 알고, 누구는 들어줄 줄 아는 귀를 가졌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본래 모습이 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오직 나의 것이다. 사회의 체계 안에서 주어진 역할의 정의와 표본에 충실할수록 기억해 내기 어려운 본래의 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이자, 세상을 발견하는 각자의 렌즈다.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것, 생명이다. 생김새도 성향도 성격도 능력도 다르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서로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이 생명 안에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두 보고 있는 칠판, 내게 요구되는 정답에 대한 불편하고 사치스러우며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앞으로 가는 거대한 사회의 흐름 안에 있을 때는 이것을 우리는 정도에서 이탈, 전체에서 소외, 뒤를 돌아보는 시간의 낭비, 또는 낙오라고 평가할 것이다. 선생님이 요구하는 정답을 정확히 맞추는 훈련을 수십 년간 해온 우리에게는 정답에서 반드시 멀어져야만 하는 이 여정이 굉장히 낯설 것이다. 가보지 않았고 돈으로 환산이 어려우니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거대한 세상의 체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단 한 사람, 나에게 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나를 진정한 풍요로 인도하는 여정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진정한 풍요가, 내가 던지는 질문과 발견 안에서 시작된다. 각자가 찾은 각자의 렌즈가 서로의 발견을 도울 것이다.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나누는 능력, 올라가는 능력이 아니라 협업하는 능력이, 물질이 넘치는 풍요의 시대에 서로를 존재적 빈곤으로부터 구해줄 능력이다.
<다음 글: [Why] 돈의 작용 반작용 (Action and Reaction of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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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영, [Why] 프롤로그: 왜 ‘Why’인가? (Prolog), 오가닉미디어랩, 2022.
- 윤지영, “안과 밖이 없는 세상, 겉과 속이 같은 브랜드,” 오가닉 마케팅,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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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예시: 윤지영, [Why] 어느 강아지의 발견 (The Discovery of a Puppy), 오가닉 미디어랩, 2023, https://organicmedialab.com/2023/04/02/why-walk-of-a-puppy-full-of-curiosity/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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