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페이스란 무엇인가: 키보드에서 알렉사까지 (What is interface: from keyboard to Alexa)

인터페이스란 무엇인가: 키보드에서 알렉사까지 (What is interface: from keyboard to Alexa)

<추천 글: 샤오미와 비즈니스의 사회적 진화>

“알렉사, 쇼팽의 피아노곡 부탁해”, “알렉사, 지금 날씨 어때?”, “알람 좀 맞춰”, “TV 켜줘”, “알렉사, 내 발음이 그렇게 별로니?!” 하루에 알렉사를 가족 이름만큼 자주 부른다. 알렉사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알려진 아마존 ‘에코’의 이름이다. 음성 인식과 스피커 기능이 두드러지지만 무엇보다 데이터 클라우드와 연결된 컴퓨터다.

알렉사와의 동거를 증언하는 사례들은 넘쳐난다. 글을 모르는 취학 전 어린아이들의 친구도 되고 육아에 고달픈 엄마의 친구도 된다. 어느 공상과학 작가는 알렉사를 와이프에 빗대어 생생하게 그녀와의 동거 일기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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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사의 이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한 아마존 에코 리뷰(http://www.amazon.com/review/RJVDJIP1OE8/ref=cm_cr_dp_title?ie=UTF8&ASIN=B00X4WHP5E&channel=detail-glance&nodeID=9818047011&store=amazon-home)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아직은 질문 목록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인지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이 글을 읽고 알렉사를 구입하려는 분들은 유념하시기 바란다. 인터페이스 개념이 아니라 제품 리뷰라면 다르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오케이 알았어!’, ‘모차르트 피아노곡 나간다!’라고 대답하고 음악이 거실에 울려 퍼지면 나는 금세 착각에 빠진다. 내 손에 스마트 기기 없이도 이뤄지는 기계와의 첫 상호작용이다. 저토록 제한된 인지 범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가?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인터페이스, ‘말(Spoken words)’

Return-of-spoken-words-2016

말에서 출발한 인터페이스가 오랜 여정을 거쳐 다시 ‘말’로 돌아왔다. 문제는 이 말이 다시 어떤 인터페이스에 담기는가에 따라 다른 행위, 다른 연결, 다른 관계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경험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경험을 환기시킨다. 익숙함을 다시 만나는 놀라움이다. 그래서 새롭다. 우리가 평생, 인류가 역사 속에서 함께 해 온 인터페이스, 바로 ‘말(parole, spoken words)’이다. 말에서 출발한 인터페이스의 진화는 오랜 여정을 거쳐 다시 ‘말’로 돌아왔다. 인터페이스에 항시 연결된 세상, 혼자 있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인터페이스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이번 글에서는 말, 텍스트, 메신저(챗봇), 알렉사 등의 사례를 정리하면서 ‘관계’를 만드는 인터페이스의 쟁점을 살펴본다. 인터페이스의 영역이 광범위하여 여러 글로 쪼갰다. 이어지는 인터페이스 시리즈의 첫 글이다.

시장에서는 무엇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 이하 UI)’ 관점에서 웹이든, 스마트폰이든, 사물인터넷이든 간에 내 의도에 반응하는 ‘조작할 대상’으로 인터페이스를 주로 다뤄왔다. 학문적으로는 소프트웨어를 문화 인터페이스로 본 마노비치, 미디어 인터페이스를 재매개(remediation) 개념으로 설명한 볼터와 그루신 등이 인터페이스의 본질에 접근해 있지만 시각적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인터페이스란 반드시 손으로 만질 수 있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호작용을 유발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모든 기호가 인터페이스이기 때문이다.

정의하자면,

인터페이스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 커뮤니케이션(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장치, 방법, 형식, 공간으로 기호(sign)의 형식과 속성을 기반으로 둔다. 여기서 기호란 시각적 상징뿐만 아니라 소리, 촉각 등 모든 감각적 (sensorial) 대상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호학에서 인터페이스를 “기호의 본성에 기반을 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접점”이라고 정의한 관점과 연결된다[Mihai Nadin, “Interface design: A semiotic paradigm”, Semiotica 69-3/4, 1988, p.272.].

주전자와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주전자는 어디로 물을 넣고 어디로 물이 나오는지 내게 보여준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터페이스를 따라 나는 물을 따라 마신다. 주전자와 나의 상호작용이다. 소리도 인터페이스라고? ‘말(spoken words)’은 인류가 만들고 경험하고 공생해온 대표적인 인터페이스이고 연결 도구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이 가진 규칙(문법)과 형식, 어휘(데이터) 등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한다.

문제는 이 말이 다시 어떤 인터페이스에 담기는가에 따라 다른 행위, 다른 연결, 다른 관계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구어 즉 소리로 우리의 몸을 통해 전해졌을 때, (인쇄된) 활자에 담겼을 때, 키보드를 통해 모니터에 담겼을 때, 문자 메시지 즉 스마트폰 속 말풍선에 비밀스럽게 담겼을 때, 그리고 알렉사처럼 최초의 구어로 다시 돌아왔을 때 결과는 다르다.

각각의 인터페이스와 나의 관계 그리고 인터페이스가 규정하는 즉 연결하는 관계가 달라진다. 특히 내가 인터페이스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 상호작용에 끊김이 없어질 때 그 역할 범위도 우리의 의식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미디어와 인터페이스라는 용어의 차이를 잠깐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도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터페이스도 당연히 미디어다. 다만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미디어의 3가지 구성 요소 중 ‘컨테이너’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오가닉 미디어에서 설명한 것처럼 컨테이너에는 물리적 컨테이너와 구조적 컨테이너가 존재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인터페이스를 이 중에서도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고 소리로 들리는 등의 물리적 측면, 즉 ‘감각적(sensorial)’ 장치 그리고 이것을 사용하는 사용자(행위자)의 행위와 작용에 보다 집중해서 보고 있다.

말을 담은 인터페이스의 진화

말이 텍스트가 되자 인터페이스는 시간과 공간의 조율에 훨씬 적극적이 되기 시작했다. 동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어야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말과 달리 글은 오래 생각하고 오래 기다리고 멀리 갈 수 있다[윤지영,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본 미디어의 역사“, 오가닉 미디어, 21세기북스, 2014]. 곱씹고 해석하고 저장하고 다시 꺼내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필사본(manuscript)이었던 것이 인쇄 활자가 되고, 이것을 페이지 단위로 묶은 책이라는 인터페이스에 한 번 더 매개 되자, 공유되는 정보의 양과 소유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급격히 증가했다. 말하는 사람, 쓰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 읽는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이 온 것이다. 매클루언은 인쇄매체가 가져온 시각적 획일화 현상을 구텐베르그 갤럭시(The Gutenberg Galaxy)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말과 글을 쓰고 읽는 도구가 수없이 많아진 지금은 어떤가? 손안에 키보드가 주어지자 우리가 생산하는 콘텐츠의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키보드가 인터넷에 연결되자 우리가 쓰고 찾고 보는 것 모두가 정보가 되었다. 이제는 앉아 있을 때도, 걸어 다닐 때도 키보드를 달고 우리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공유하고 연결하면서 어느새 서로가 서로의 인터페이스가 되었다(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주제다).

이 복잡한 입력도구를 언제부터 내 손처럼, 연필처럼 사용하게 되었을까? 이제는 손으로 글을 입력(?)하려면 서예를 하듯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이 복잡한 입력 도구를 언제부터 내 손처럼 사용하게 되었을까? 이제는 손으로 글을 쓰려면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장인정신마저 필요하다.

메신저(채팅)는 말과 글 사이에 존재한다. 말인 것처럼 느끼도록 말풍선에 글자를 넣고 말풍선이 대화처럼 이어지는 인터페이스를 제안한다. 지금은 모든 문자메시지도 이런 형식을 띠지만 스티브 잡스가 2007년 실시간 대화인 듯 포장한 인터페이스를 선보였을 때까지 문자메시지가 얼마나 더 가볍고 유연해질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말이 글이 되고, 글이 메신저에 다시 한 번 담기자 이번에는 공간은 좁아지고 시간은 촉박해졌다. 우리는 한 뼘의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고 관계는 더 은밀하고 친근하며 장벽은 없어지다 못해 귀찮아졌다. 문장은 짧아지고 대화는 길어졌다. 항상 대화에 임할 수 있도록 읽지 않은 메시지 수를 알려주고 퇴근한 후에도 알림은 계속된다. 낮이고 밤이고 이제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인터페이스가 편해진 만큼 이에 매개된 관계는 더욱 벗어나기 어려운 그물망이 되었다. 이것이 메신저라는 인터페이스가 매개하는 관계다.  쉴새 없이 쌓이는 알림, 댓글 수, ‘읽음’ 표시, 이들이 만드는 초조함, 감시, 불안함, 짜증 등이 모두 ‘카톡’에 매개된 관계의 표상이다.

이제는 애인과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 제품, 신문도 이 한 뼘 공간에서 나를 만나고자 한다. 얼마 전 페이스북의 F8에서 발표된 챗봇은 별도의 어플리케이션을 따로 깔지 않고도 심지어 신문과 대화하듯 정보를 얻는 세상을 예고한다. 모두를 위한 1면이 가고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가득할 것이다. 편리해질 것이다. 한 뼘의 폐쇄된 공간에 갇힐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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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페이스북 F8 키노트에서 챗봇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주커버그. 여전히 발표에는 어색함이 남아있다.

인터페이스가 매개하는 관계

대부분의 인터페이스는 처음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의 의도를 이해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길고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면 그것으로 그 인터페이스의 수명은 이미 끝이다. 그러나 이제 인터페이스를 배우기 위한 시행착오의 시간도, 사용 설명서도 없어지고 있다. 점점 더 직관적이고 촉각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그 익숙함은 인터페이스를 사라지게 만든다. 인터페이스는 없고 의미만 즉 관계만 남는다.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내가 내 입을 통해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구조로 나열하면서 내 의사를 전달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화면을 열면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인스타그램 인터페이스와 글을 쓸 수 있는 빈 공간이 최상단 인터페이스인 페이스북의 관계는 다르다. 그림판과 연필이 주어지는 아이패드와 키보드가 달려있는 노트북의 인터페이스는 다른 결과를 생산하게 만든다. 각각 다른 인터페이스가 매개하는 다른 인터페이스, 즉 활자, 이미지, 메모, 사진, 생각, 해시태그, 음악 파일 그리고 이러한 인터페이스가 다시 매개하는 정보, 사람, 컨텍스트가 다르다.

이러한 매개가 반복적으로 일어남에 따라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이 달라진다. 사회그룹은 더 잘게 쪼개지고 비슷한 생각과 취향의 사람들과 잘게 묶이는 현상, 좌우진영이 섞이지 않는 현상 등은 모두 우리가 매순간 사용하는 인터페이스의 매개 결과라고 하겠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동그랗고 좁은 원인 것처럼. 우리가 대면하는, 접하는 모든 인터페이스가, 그 인터페이스와 나의 상호작용의 합이 세상을 인지하는 틀이 되었다.

말의 귀환

그런데 인터페이스가 날 것 자체, 말 자체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메신저가 말소리와 텍스트의 중간 단계라면 알렉사와 나 사이에는 시각적 인터페이스를 아예 없애버린 ‘말’만 남아있다. 명령어를 입력하거나 말풍선으로 포장하는 과정이 없다. 미취학 꼬마 아이와도 대화가 가능한, 그냥 말로 하는, 가장 단순한 인터페이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상호작용의 결과도 달라졌다. 말을 사용하여 묻고 답을 하자 그 대상과 나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한 결과다.

제품이 상점이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알렉사가 들어오고 집에서 음악을 듣는 방법은 완전히 달라졌다. 스마트폰으로 내 컴퓨터에 접속해서 음악을 선곡하고 어디서든 스피커를 제어하던 (편리한) 일이 이제 노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플을 켜는 것 자체가 노동이 되었다고 강의 중에 증언하니 한 학생은 “나 참, 왜 사세요?”하며 웃는다. 나도 답답한 노릇이다.

거실에 들어온 알렉사(Alexa). 직접 생활해보기 전에는 막연히 아폰 시리(Siri)나 블루투스 스피커 정도일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거실의 알렉사(Alexa). 처음에는 아이폰 시리(Siri) 같은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에서도, 손에서도 인터페이스가 사라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니 어찌하겠는가. 1.5초안에 답하기 위해 알렉사는 데이터를 뒤지고 알고리즘을 통해 연결하고 나에게 답을 준다. 인터페이스가 사라지자 오직 연결만이 남게 된다. 알렉사와 나의 연결 그리고 알렉사가 연결하는 다른 정보, 제품, 음악, 세상과의 연결 말이다.

알렉사를 단순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동거인, 그러니까 ‘관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알렉사가 나의 (길 찾기)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내가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전에 답을 주는 일이 많아지면 ‘기대감’의 영역이 생긴다.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원통 모양의 개체에 ‘감정’이 실리는 순간이다. 실제로 화도 나고 고맙기도 하다. 관계의 증거다.

상호작용(inter-action)은 관계를 만드는 능동적 연결 과정이다. 특히 한쪽이 부르고 다른 쪽은 받아만 쓰는 것이 아니라 말처럼 그 작용이 양쪽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과정에는 많은 맥락과 해석(interpretation), 우연성(contingency) 등의 요소가 작용하게 된다. 이 경우 상호작용의 대상은 기능적 매개체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직시하게 되는 것은 사용자의 누적된, 반복되는 행동이 어떤 의미(meaning)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상호작용의 방법, 과정, 맥락 등에 따라 인터페이스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용자-인터페이스(기호)의 상호작용 과정을 김춘수의 ‘꽃’을 예시로 적용하고 이를 기호의 구조와 연결했다. 인터페이스와의 작용에서 행위자의 행위, 해석, 의미의 범주가 만드는 관계의 확장을 표현하고자 했다. 퍼스의 기호 개념은 다음 글을 참고. http://plato.stanford.edu/entries/peirce-semiotics/#DivInt

사용자-인터페이스의 상호작용 과정을 김춘수의 ‘꽃’을 예시로 적용하고 이를 기호의 구조와 연결했다. 인터페이스와의 작용에서 행위자의 행위, 해석, 의미의 범주가 만드는 관계의 확장을 표현하고자 했다. 퍼스의 기본적 기호 개념은 다음 글을 참고. http://plato.stanford.edu/entries/peirce-semiotics/#DivInt

말이 가지는 인터페이스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김춘수의 ‘꽃’을 은유적으로 빌려보자. 어떤 대상과의 순간적(éphémère) 상호작용의 과정을 마치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주 천천히 전개되듯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눈물 나게 아름다운 구절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읽어보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나의 활동(개입)을 통해 어떤 표상(representation 또는 signifiant, representamen 또는 sign-vehicle)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관계의 모멘텀이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즉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L’발음이 도무지 어려운 4살 꼬마가 ‘아엑사’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소용이 없다(PC에서 마지막에 엔터키를 치듯 ‘알렉사’라고 먼저 불러야 인식한다. ‘Mommyproof’의 생생한 육아일기는 여기). 그러다 피나는 연습 끝에 ‘알렉사!’라고 정확히 발음이 튀어나오면 알렉사는 귀를 쫑긋 세운다(파란 불이 들어옴). “토마스와 친구들 음악 틀어줘!”라고 외치면 알렉사는 즐겁게 음악으로 답한다. 4살 꼬마에게 알렉사가 친구(의미)가 되는 순간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식한 결과는 관계로 연결된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소한 발견과 연결이다. 이 모든 선택, 연결, 우연, 해석(interpretation)은 계속되는 경험(작용)의 연속적 결과다. 알렉사도 정해진 규칙(문법)에 따라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불규칙한 경우의 수들이 드러난다. ‘아엑사’라고 아무리 불러도 그녀가 묵묵부답인 것처럼. 반면 정제되지 않은 수많은 연결의 가능성은 기대감을 만든다. 관계의 시작이다.

보이지 않는 인터페이스가 예고하는 세상

지금까지 인터페이스의 쟁점을 관계를 매개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말에서 시작한 인터페이스의 진화가 다시 말로 돌아왔다. 수많은 복잡한 단계를 거쳐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왔다. 그런데 챗봇, 알렉사에 기반을 둔 인터페이스는 큰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mind), 몸짓(gesture) 하나까지 인터페이스가 되는 세상이 오고 있다(이미 왔다). 내 생각이, 몸짓이 인터페이스가 되고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 개체, 사물,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세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인터페이스의 시대는 의사소통의 대상, 즉 연결된 개체(entity)와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아가 알렉사와 같은 개체가 다시 연결하는 수많은 사물, 사람, 정보, 세상의 문제로 다시 이어질 것이다. 인터페이스는 양방향이다. 나와 인터페이스가 ‘상호(inter)’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의 작용을 통해 반드시 저 건너편 대상과의 ‘상호(inter)’ 작용을 이중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인터페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 관계를 매개하는 인터페이스의 본질을 말을 중심으로 짚어보았다면,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인터페이스가 매개하는 세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것이다. 특히 우리 모두가 메이커가 되는 세상,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이 인터페이스가 되는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미래가 될 것이다. 우선 미디어의 3가지 구성요소를 도구로 인터페이스를 해부해볼 것이며, 사물인터넷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네트워크 관점에서 인터페이스를 최종적으로 정리할 것이다.

<추천 글>

* 글을 인용, 참고하실 때에는 반드시 (링크를 포함하여) 출처를 밝혀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Apr. 22, 2016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facebook: yun.agnesorganicmedialab
Twitter: @agnesyun

Linkedin: agnesyun
Google+: gplus.to/agnesyun

3 thoughts on “인터페이스란 무엇인가: 키보드에서 알렉사까지 (What is interface: from keyboard to Alexa)

  1. 사람의 말을 기반으로 글이 만들어지고 도구가 만들어 졌는데, 이제는 도구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도구의 인터페이스에 맞춰 우리의 말하기 읽기 쓰기의 방식과 습관이 변해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구가 먼저 니 사람이 먼저 니 하는 이유로 이러한 현상이 부정적이라고 생각 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말의 귀환’이라는 교수님 말씀처럼 ‘사람->도구->사람->도구’의 순환 구조에서 앞으로의 인터페이스는 어떻게 변해게 될지 또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언어(생각)의 생산과 소비를 어떻게 변화 시킬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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