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Why]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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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삼각관계

1. 둘이 아닌 하나

우리는 각자의 전공이 하나로 합쳐진 두 사람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배경으로 네트워크와 사용자 정체성을 공부했다. 살아있는 네트워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모든 가치가 ‘관계’에 있음을 인터넷 서비스든, 기획 방법론이든, 미디어의 개념이든 입증하고 전해오고자 했다. 동료는 미국에서 분산 데이터베이스를 전공했다. 경영정보학을 배경으로, 시장을 정보재 관점으로 바라보고 기업들에게 소프트웨어 중심 사고를 전파해왔다. 두 관점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오가닉미디어랩(이하 ‘랩’)이다.

살아있는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라니, 정체성과 정보라니, 도대체 화해가 가능한 영역인가? 새벽 4시까지 이어지곤 하던 회의는 물병을 집어던지며 싸울 정도로 격렬했다. 언어도, 관점도, 뇌의 구조도, 토양도 심하게 달랐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각자의 사고의 틀 밖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격렬한 시간을 지나고 또 지나자 서서히 평화는 찾아왔다. 두 원리가 기어이 화해하고 하나로 합쳐진 것이 지금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철학에도, 전략에도, 기술에도 가둘 수 없는, 여기 오직 두 사람만 전할 수 있는,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세상은 이벤트의 연속이다. 인류 역사에 연일 새로운 뉴스가 갱신되고 진화인지 멸망인지, 희망인지 불안인지 알기 어려운 일들이 기술, 건강, 자연, 전쟁, 의식, 미디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겉과 속이 어떻게 다른 일인지, 뿌리가 어디이며 어떤 해석이 필요한지, 서로의 이해를 돕는다. 신뢰가 일한다. 알던 것을 계속 버리고 새로 배울 수 있게 돕는다. 세계관이 계속 확장되는 경험속의 우리는 여전히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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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시간의 연결: 선순환의 선순환 (Virtuous Cycles of Virtuous Cycles)

[Why] 시간의 연결: 선순환의 선순환 (Virtuous Cycles of Virtuous Cy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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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간 시리즈의 결론을 맺을 수 있는 지점까지 왔다. 본래 시간은 이 책에서 다루려고 계획했던 주제는 아니었다. 공간을 해체하고 네트워크로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어떻게 시간을 해체하고 네트워크로 이해하자고 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다른 이해가 없이는 북극성이 있어도, 불꽃은 선형성이 만드는 시간에 깔려 쉽게 사그러 드는 것을 수차례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가 이 책의 주제라면, 시간은 누구와 어떻게 갈 것인가, 실행을 위한 매개체라 할 것이다.

환기하자면 첫 글에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간의 선형성에 문제를 제기했다(시간의 재발견). 두 번째 글에서는 시간을 해체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네트워크의 시간이 어떻게 다른지, 컨텍스트, 컨테이너, 콘텐츠, 미디어의 3가지 구성요소를 렌즈로 들여다보았다(시간의 해체). 그리고 앞선 세 번째 글에서 선순환의 원리를 정리하고 가속도를 만드는 중심 축과 회전의 힘, 이 둘의 상호작용을 살펴보았다(시간의 창조).

이제 시리즈 마지막 글에서 ‘선순환의 선순환’을 살펴볼 것이다. 나눌수록 커지는 가치가 중심인 선순환은 한 방향을 보고 있는 다른 가치를 만날 때 더 큰 선순환을 일으킨다. 선순환을 통해 창조된 시간이 서로 연결된다. 한 사람의 작은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선순환은 스스로 가속도를 만들고 악순환을 흡수하는 거대한 힘이 된다. 우리가 한 방향을 보며 가는 과정에서 발견할 새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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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시간의 창조: 선순환의 모멘텀 (Momentum of Virtuous Cycles)

[Why] 시간의 창조: 선순환의 모멘텀 (Momentum of Virtuous Cy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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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지가 내가 하는 일을 결정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또한 나를 결정한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간다. [(…) Ce que nous faisons dépend de ce que nous sommes ; mais il faut ajouter que nous sommes, dans une certaine mesure, ce que nous faisons, et que nous nous créons continuellement nous-mêmes.]1

선순환은 생명체의 운동과도 같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오늘이 죽어서 과거가 되는 원리가 아니라, 살아서 지속적으로 계속 변화하며 운동 중인 상태, 네트워크 시간의 원리를 따른다. 그래서 살아있는 다른 ‘왜’를 만나고 결합하고 진화한다. 이것이 네트워크 세상에서 가치를 만드는 과정, 시간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지금부터 선순환의 원리를 차분하게 알아보고 네트워크 세상에서 가속도를 만드는 힘, 개인과 세상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힘에 대해 정리하며 시간시리즈의 결론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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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악순환의 해부학 (Anatomy of Vicious Cycles)

[Why] 악순환의 해부학 (Anatomy of Vicious Cy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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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면 정말 균일하게 크고 반짝이며 색깔도 너무 고운 사과와 배가 택배상자에 실려 전국으로 배송된다. 그러고 보면 과일들이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크기와 당도로 열려서 매년 날짜도, 날씨도 달라지는 명절에 선물상자에 공산품처럼 담기려면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농약 성분인 성장촉진제를 맞고, 붉게 반짝이는 사과를 위해 착색제를 바르고, ‘당도를 맞춰서 오라’는 마트의 요청에 따라 딸기에 ‘작업’을 해야하는 현실은 농부의 잘못일까, 마트의 잘못일까, 내 잘못일까, 과일 잘못일까. 자연의 섭리대로 짓는 농사는 점점 더 귀해지는 세상이다.

농산물만은 아니다. 장보기를 할 때 나는 앞면보다 뒷면을 먼저 본다. 앞면에는 분명히 “한 방울까지 그대로 착즙”했는데 뒷면에는 합성향료와 농축액으로 맛을 냈다는 정보가 정말 작은 글자로 쓰여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잠봉과 프로슈토에는 색소와 보존제 역할을 하는 아질산나트륨이 포함되어 있다고 꼭 뒷면에서만 말을 해준다. 잊고 있다가 1급 발암물질이라고 보도가 될 때마다 사람들은 처음처럼 놀란다. 나처럼 ‘유난을 떠는’ 사람들은 참 인생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도대체 상상하기 어려운 인공첨가물이 모든 식품에 들어가 있고 내 몸에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불편해도 어쩔 수가 없다.

먹을 것은 넘쳐나는데 믿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없어지는 세상이라니, 100세 시대라는데 우리가 생산하고 또 섭취 중인 환경 호르몬으로 질병은 더 많아진 세상이라니, 음식쓰레기를 어떻게 잘 버릴까 고민해야 하는 풍요의 시대에, 80억 인구가 다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 시대에, 세계의 절반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니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1). 누구 한 사람, 어느 한 기업, 어느 한 국가, 어느 한 현상에서 원인을 찾기에는 그 뿌리는 깊고 복잡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악순환은 사소한 식탁부터 인류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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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시간의 재발견: 해피엔딩의 함정 (Time Trap of Happy Endings)

[Why] 시간의 재발견: 해피엔딩의 함정 (Time Trap of Happy En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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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째깍.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사는 것처럼 시간은 들리지 않아도 항상 흐르고 있다. 내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숨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한,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과 끝이 있는 일생에서 흐르는 시간은 떼어낼 수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우리 삶은 과거와 기억이 있고, 미래와 계획이 있고, 유년과 노년이 있는 시간의 기록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은 우리 삶의 규칙이자 리듬과 질서, 평생을 이끄는 주인과도 같다. 밀고 가는 시간, 따라가는 시간, 쫓기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의 선형성 안에 우리의 사고가, 존재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시계가 멈추었다. 시간의 선로 밖에 서게 된 나는 시간의 소리를 들었다. 쿵쾅쿵쾅, 들리지 않던 소리가 요란한 굉음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나의 잘난 삶 전체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이 아니라, 그 굉음을 견뎌온 낭비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의 벽에 놓인 것처럼, 더 가야 하는데 갈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를 싣고 달리는 기차가 시간의 선로를 따라 달아나듯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문득 깨닫게 된 것은 남겨진 내가 아니었다. 바로 이때였다. 그 시간의 기차가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알아낼 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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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왜’를 찾아서 3편: 질문의 힘

[Why] ‘왜’를 찾아서 3편: 질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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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성공지표(Key Performance Index)는 퇴사율이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더 크게 매출에 기여하라고 회사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교육에 보냈는데 그 결과가 퇴사라니 황당한 얘기다. 그런데 이런 일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비즈니스의 본질적 변화, 가치를 만드는 원리가 본질적으로 진화했음을 깨닫게 되면 선택의 폭은 넓지 않다. 지금은 천동설과 지동설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두 관점을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레시피가 없다. 하나가 진리로 밝혀지면 하나는 거짓이 된다.

비즈니스의 천동설

비즈니스에서 천동설은 근대에서 현대까지 수백 년 간 유지되어왔다. 기업은 가치를 만들고 전달하는 주체이며, 그래서 소비를 창출하고 시장을 이끄는 주체가 되어왔다. 생산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사슬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시장도, 사회도, 그래서 세상도 돌아갔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처럼 이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갔다. 이에 따라 인류의 성장이, 질서가, 문명이 이뤄져왔다. 개인의 삶도 기업이 만드는 가치를 따랐다. 더 멋지다고 말해주는 메시지를 따라서 입었으며 더 건강하다는 메시지를 따라서 먹었으며, 더 편리하다는 메시지를 따라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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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닉 에너지] 풍요에 답이 있다

[오가닉 에너지] 풍요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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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제인구달 박사의 강연을 듣기 위해 이화여대 대강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티케팅이 1분 컷이었을 정도로 망가진 지구와 환경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그녀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희망이란 막연한 생각이나 바람이 아니라 ‘실천’이며 매일 작게라도 행동하고 주변을 전염시키는 삶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90세를 맞이한 그녀는 온 삶을 통해 이 메시지를 전해왔다. 남은 삶도 파괴된 자연의 복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말에 감동과 희망이 일렁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헌신과 희생이며 사랑의 실천일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사랑을 배우고 싶고 실천하고 싶다. 다만 오늘은 이 감동의 메시지와 별개로, 함께 하는 작은 행동이 주변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인 결과를 현실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틀 밖에서 답을 찾아와야 한다. 제인구달 박사의 사랑의 메시지는 가슴에 품되 실천은 더 냉정하게 하자. 각자의 삶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위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후변화를 종식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글을 계속 읽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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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닉 에너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자세: 무엇이 문제인가?

[오가닉 에너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자세: 무엇이 문제인가?

뜨거워진 지구는 우리 삶에, 일상에 침투해 있다. 홍수,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에서 그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점차 빈곤, 건강, 먹거리 등 인류 전체의 먹고 사는 문제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당장 대한민국의 이 여름은 얼마나 뜨거웠으며 얼마나 이상 기후로 하루가 멀게 시달리고 있는가. 인류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극한 현상은 이미 ‘정해진 미래’가 되었고 더 극단적인 상황은 이미 임박해 있다.

그러니 자리에 앉으면 모두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들 한다. 그렇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모두 알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활동 즉 우리의 소비가 불러온 재앙이라고 한다. 그러면 질문을 하나 해보자. 35도를 웃도는 폭염에 오늘 나는 에어콘을 끌 수 있을까? 에어콘 없는 식당에서 불평없이 밥 한끼 먹을 수 있을까? 내연기관차를 타지 않고 출근할 수 있을까? 더 적게 먹고, 더 적게 쓰고, 추워도 더워도 불편해도 지구를 위해 나, 오늘, 무엇을 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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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왜’를 찾아서 2편: 내가 찾은 비밀

[Why] ‘왜’를 찾아서 2편: 내가 찾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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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왜’를 찾아서 1편: 9시간의 사투]에서 이어집니다. ‘8시 55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1편을 꼭 먼저 읽고 오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쉼 없이 달려온 지 정확히 9시간이 경과된 그 순간, 세포가 쭈뼛하게 서기 시작했다. 이제 건축가가 발견한 ‘왜’를 공개하면서 ‘왜’란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씩 정리할 것이다. ‘왜’를 발견하는 여정은 3 단계로 이뤄져 있다. 첫째, ‘왜’를 정의하기 위해 구체적인 문제점(pain points)을 나열하는 단계가 요구된다. ‘왜’가 딛고 설 토양이다. 낱낱이 해부해서 더 발라낼 것이 없는 단계까지 내려가서 뼈만 찾아온다. 둘째, 주인공인 ‘왜’를 한 문장으로 찾아온다. 물은 여기서 끓는다. 셋째, 이 ‘왜’를 뿌리로 나(내 일)의 ‘존재이유’가 정의된다. 어디로 길을 떠날지 나침반을 완성한다. 세 단계는 두리뭉실한 컨셉을 넘어서서 단단하게 손에 잡히는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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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왜’를 찾아서 1편: 9시간의 사투

[WHY] ‘왜’를 찾아서 1편: 9시간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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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만의 ‘왜(Why)’를 찾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왜 그 일을 하세요?”라고 물으면 “한 사람의 변화가 그 ‘왜’에서 시작됩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고작 단 한 사람이요?”라고 묻는다면 “한 사람의 변화는 가장 강력합니다. 세상의 변화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 사람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연결을 만드는 매개자로서, 네트워크의 주체로서 각자의 세계를 이끌고 그 결과 세상을 결정한다. 그래서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은 하나의 유기체다. 단 한 사람이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과거의 경직된 조직처럼 기계적이고 위아래의 위계와 지배구조를 가진 모양에서는 불가능하던 일이다. 그러나 비즈니스든, 미디어든, 교육이든, 어떤 분야이든 간에 이 낡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직은 이미 도태되거나 소멸로 가고 있다. 여기, 한 사람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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