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왜’를 찾아서 2편: 내가 찾은 비밀

[Why] ‘왜’를 찾아서 2편: 내가 찾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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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왜’를 찾아서 1편: 9시간의 사투]에서 이어집니다. ‘8시 55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1편을 꼭 먼저 읽고 오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쉼 없이 달려온 지 정확히 9시간이 경과된 그 순간, 세포가 쭈뼛하게 서기 시작했다. 이제 건축가가 발견한 ‘왜’를 공개하면서 ‘왜’란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씩 정리할 것이다. ‘왜’를 발견하는 여정은 3 단계로 이뤄져 있다. 첫째, ‘왜’를 정의하기 위해 구체적인 문제점(pain points)을 나열하는 단계가 요구된다. ‘왜’가 딛고 설 토양이다. 낱낱이 해부해서 더 발라낼 것이 없는 단계까지 내려가서 뼈만 찾아온다. 둘째, 주인공인 ‘왜’를 한 문장으로 찾아온다. 물은 여기서 끓는다. 셋째, 이 ‘왜’를 뿌리로 나(내 일)의 ‘존재이유’가 정의된다. 어디로 길을 떠날지 나침반을 완성한다. 세 단계는 두리뭉실한 컨셉을 넘어서서 단단하게 손에 잡히는 실체다. 

다만 타인이 찾아낸 ‘왜’가 구경꾼까지 100도로 끓게 만들기는 어렵다. 각자의 유일한 여정을 통해 몸으로 ‘왜’를 찾아내는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이 간접경험이 얼마나 여러분의 세포를 깨우고 뇌를 깨우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왜’의 실체는 내가 전해야 할 비밀이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왜’를 만나며 알게 된 것을 전해야 할 임무가 내게 있다.

‘왜’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꼭 지구를 구하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 삶이, 내 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 스스로 삶과 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왜’는 목표의 설정이 아니다. 내 안에서 자라온 실체, 본질의 발견이다. 그래서 고작 그 한 문장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경험이 된다. 변명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시계를 돌려 건축가의 ‘왜’가 풀려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자.

건축가가 발견한 ‘왜(Why)’

8시 55분, 그는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거침없이 4개의 문제점을 쏟아냈다. 첫째, 건축주들은 동서남북을 보지 못한다. 바람, 자연, 건물 등 토지마다 가진 컨텍스트다. 둘째, 수익과 직결되지 않는 공용공간에는 관심이 없다. 셋째, 지하와 옥상 등을 잘 활용하고 싶지만 공사비 때문에 포기한다. 넷째, 방문하는 사용자(거주자가 아닌 사용자)를 위한 공간이 중요한지 모른다.

듣고 있던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기가 비등점이었다.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명확하고 단단한 답이었다. 이런 문제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 이들을 포괄하는 본질적인 ‘왜’가 무엇인지 물었다. 답은 곧바로 이어졌다. 사투가 끝나고 그 방의 모든 질문들이 단번에 부서졌다. “모든 건축주들이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곳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답은 바로 그곳에 있다.”

그의 ‘왜’는 9시간 만에 쏟아져 나왔다. 시간은 잠시 멈춰 서서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지금 무슨 일이 났는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한 문장으로 모든 문제가 정의되었다(problem definition). 이 하나에, 건축주의 문제, 건축가의 문제, 건축물의 문제, 시공사의 문제, 사용자의 문제, 주변 환경과 방문자의 문제, 그러니까 모두의 문제가 들어 있었다. 돈이 안 되는 곳에 왜 답이 있다는 말인가. 

이제부터는 질문이 뒤바뀐다. 그를 바닥까지 데려가서 ‘왜’를 꺼내올 수 있게 돕는 질문이 아니다. 그의 놀라운 ‘왜’를 이해하고 배워서 한 팀으로 동행하기 위한 질문으로 전환된다. 닻은 이미 새로운 출발로 향하고 있었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곳은 건물과 만나는 주변의 경계, 수익(거주) 공간과 경계에 있는 지점들이다. 돈으로 바로 환산되지 않는다. 주인공이 될 수 없고 가치가 없는 주변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 첫째, 그곳은 공공의 이익이 있는 곳이다.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는 대신 경험이 나눠지는 공간이다. 둘째, 경계를 이루는 공간이다. 하늘과 땅의 경계, 건물과 외부의 경계,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 사는 사람들과 만나기 전, 대지의 경계선 등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공간으로 태어난다. 셋째, 그래서 연결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갔다. 거꾸로 말하자면 모두가 그냥 지나치지만, 오직 그 땅만 가지고 있는 답을 담은(을) 공간이다. 사용자의 경험이 건물의 자산으로 쌓이고 반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다. 콘텐츠를 둘러싼 컨텍스트가 살아나서 생명을 만들 수 있는 연결의 지점들인 것이다(1).

건축주들은 건물이 돈이 되기를 원한다. 많은 미사여구를 걷어내면 결국 핵심은 돈에 있다. 그래서 긴 기간을 지나며 비용에 따라 의사결정은 여러 번 수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장이다. 돈은 마르고 당장 돈이 되는 수익공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모두가 한 방향을 보는 팀이 아니라 각자 자기 방향으로 달리게 된다. 그런데 건축가의 ‘왜’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답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다. 나눌수록 커지는 사용자 경험이 건물의 자산으로 쌓이는 곳이며, 그래서 건축주가 그토록 원하던 수익 가치가 커지는 결과까지 만드는 곳이다.

건축가의 한 문장이 반짝이며 ‘왜’가 무엇인지 교과서처럼 정리해주었다.

첫째, ‘왜’는 대상의 발견이다

문 닫을 시간에 쫓기던 차였다. ‘왜’를 찾은 우리는 섬광처럼 세션을 마무리했다. 전쟁을 치른 후에는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뇌는 그 어느 때보다 깨어 있었다. ‘왜’를 몸으로 다시 배운 시간이기도 했다. 일주일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금요일이 왔다. 얘기한 것처럼, ‘왜’는 세 번째 단계인 ‘존재이유’까지 가야 완성이 된다. 현업에 정신없이 쫓기며 일주일간 거의 사그라진 ‘왜’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는 데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물이 끓던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 마침내 필요한 매듭을 지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왜 나여야만 하는지, 나의 일(삶)이 누구의 무엇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지, ‘왜’에 따른 내 ‘역할’이란 무엇인가. 내가 대체가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인지 발견되는 지점이다.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꼽자면, 그는 “경계가 없는, 살아있는 건축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로 정의되었다. 이 문장은 그가 유일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땅이 가진 답을 들을 수 있어야 경계를 볼 수 있다. 경계를 볼 수 있어야 경계를 없앨 수 있다. 경계를 없앨 수 있어야 나눌수록 커지는 사용자 경험을 쌓을 수 있다. 그에게 ‘나쁜 땅’은 없었다. 모두 답을 갖고 있었다.

세모의 경사진 땅과 건축가의 스케치 2021 (c) *무단복제 불가.

같은 땅을 보고 더 멋진 건물을 그려낼 수 있는 건축가들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유일한 이유가 있다. 그의 ‘왜’가 어떤 대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왜’는 나에게만 보이는 대상을 향해 빛난다. ‘왜’는 그래서 반짝이는 보석이다. 항상 나 자신에서 출발해도 결론은 내가 아니다. 대상의 발견으로 끝난다. 내가 어떤 대상의 어떤 문제를 돕는 데에 온 삶을 사용하고 싶은지 알게 해 준다. 이 존재를 구체적으로 발견해야 비로소 내 존재를 알게 된다. 생명은 오직 관계 안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왜’를 가진 사람은 아름답다. 스스로를 비춰서가 아니라 다른 대상을 향해 있기에 감출 수 없는 빛이 난다. 건축가는 나눌수록 커지는 가치를 공간 사용자들이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 이는 함께 나누는 사용자의 가치, 그런 경험을 매개하는 공간의 가치, 그런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존재적 가치 모두를 포괄하게 된다. 그 결과는 건물의 물질적 가치로 돌아온다. 사용자의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에 건물이 반응하면 할수록, 시간이 흘러도 건물은 죽지 않고 오히려 살아난다.

건축가의 ‘왜’는 자신의 업적도, 건축주의 돈도 아니었다. 작은 공간에서도 숨을 쉴 수 있고, 시간이 잠시 멈추는 일탈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의 ‘왜’는 그런 공간이 필요한 사용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직 그에게만 보이고, 그에게만 들리는 소리, 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으며, 그를 응원하는 일은 누가 봐도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마라톤 세션이 끝나갈 때 즈음, 눈을 감아보았다. 경계 없이 흐르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숨을 쉬고, 걷고, 함께 웃고 위로하고, 읽고 나누는 풍경과 소리가, 우리에게도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둘째, ‘왜’는 스스로 성장한다

이 보석은 세상을 얻기에 충분하다. 온전히 삶의 주체로서, 고립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연결의 가치를 만드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나침반이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보석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나눌수록 커지는 가치를 위해 조직화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왜’가 없는 실행이 가치의 선형적 성장을 만든다면, ‘왜’를 가진 실행은 기하급수적 성장의 궤도에 있다. ‘왜’에 감춰진 두번째 속성이다. ‘왜’가 스스로 성장한다. 

모든 것이 무한규모로 변화하고 확대되는 네트워크 세상에서 ‘왜’는 사치스러운 질문이 아니다. 뿌리다. 바이럴을 만들고 고객을 팬으로, 직원으로 만들고 싶어 전략부터 찾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본질적인 ‘왜’의 발견 없이 가치는 시작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 대체 가치가 무엇인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생명은 만남으로 자란다. 내 ‘왜’에 동의하는 한 사람, 내 ‘왜’가 향하고 있는 한 사람, 내 ‘왜’와 방향이 같은 한 사람, 내 존재를 지지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건축가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왜’가 있어도 여행은 험난하다. 기존의 관성이, 모든 환경이 다시 나를 붙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은 체험이 배움이 되는 사이클을 여러 번 지나는 동안 작게 작게, 점점 크게 이 비밀이 전해지는 시간은 가속화될 것이다. 그래서 ‘왜’의 정의는 이미 강력한 협업의 시작이다. ‘왜’는 때로는 쪽팔리고, 때로는 불리하고, 때로는 늦어도, 끝까지 붙들 수 있는 이유, 흔들리고 지치고 나약한 나의 모든 의사결정을 돕는 평생의 조력자이며, 그런 조력자를 만날 수 있게 돕는 매개체다.

셋째, ‘왜’는 전해야 할 비밀이다

건축가의 ‘왜’는 뾰족하게 발견되기 전까지 비밀이었다. 다만 이 비밀은 우리가 알던 것과 좀 다른 속성을 지닌다.

비밀은 원래 간직되어야 한다. ‘너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릴레이가 시작되면 비밀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2). 그런데 이 비밀은 간직할 비밀이 아니다. 전해질수록 빛이 난다. 비밀이 되지 않을 때까지 널리 전해져야 비로소 가치가 부여된다. 그래서 감추어진 보물이다. 널리 전하는 방법도 ‘왜’가 알고 있다. 지금까지 두 마리 토끼(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설계와 수익을 위한 설계)를 잡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했다면 이제는 다르다. 한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를 만날 여행의 출발선에 이미 서있다. 그 과정에서 내 비밀이 다른 사람의 비밀을 만나고 결합한다. 비밀의 가치는 나눌수록 계속 커진다. 선형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심지어 무한히 커질 수 있는 네트워크의 원리를 따라갈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여정은 내가 ‘왜’를 발견해야만 시작된다.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가 않다. 내 안에서 자라고 있지만 나조차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질문이 사라진 세상, 경쟁 기차 안에서 발굴되지 않고 묻혀 버린다. 건축가의 ‘왜’는 언제나 그 안에 있었다. 쫓기던 시간을 멈추고, 모든 것을 걷어내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왜’를 발견한 후에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하지만 베일만큼 뾰족하고 명확해진 그의 ‘왜’는 그를 다시 정의한다. 이제 그는 답을 가진 사람이다.

넷째, ‘왜’는  답을 가지고 있다

이제 ‘왜’의 마지막 속성, 지금까지 언급한 줄거리의 결론이다. 수많은 세션을 거듭하며 깨닫게 된 것, 나를 뒤흔들었던 ‘왜’의 정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영원히 결합하고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가 공존한다. 한 사람 안에 감추어져 있던 ‘왜’는 두 가치 사이에 존재해 온 평행선, 화해할 수 없는 성질, 분리된 경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치의 대립이 ‘왜’를 통해 부서진다. (파괴된) 세상을 되돌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하다.

“This is the way.”

두 가치 중 하나는 물질적 가치다. 온 세상의 질서는 돈의 가치로 이뤄져 있다. 돈은 나눌수록 작아진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작동하는 가운데, 서로의 소유가 서로의 분량을, 그래서 존재를 결정해 왔다. 조금 줘야 많이 남고, 준 것보다 많이 받아내야 내 것이 커진다. 내가 어느 쪽에 위치해 있든, 상대의 결핍이 내 잉여를 만든다. 계약과 고용으로 이뤄진 모든 업무관계가 그렇다. ‘왜’가 부재할 때 오직 돈만이 의사결정의 기준이자 목적이 된다. 하지만 ‘왜’가 있다한들, 그 ‘왜’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무슨 소용인가. 모든 참여자에게 결국 물질적으로 더 유리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움직일 힘이 없다. 

다른 하나는 존재적 가치다. 물질적 가치의 위력에도 좀처럼 죽지 않는다. 우리 안에 심겨 있다. ‘저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물질적 가치와는 반대로 이 가치는 나눌수록 커진다. 모두의 지치고 찢기고 삶의 고통스러운 과정에서도 이 가치는 우리를 살아있게 해 준다. 대상이 누구고 무엇이든 이런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평판에 쫓기고 그래서 성과에 쫓기는 삶을 사는 동안, 맞춰보지 못한 퍼즐 조각이 되어 우리 삶 속에 흩어져 있다.

본질적인 ‘왜’는 여기서 풀려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 그래서 물질적 가치에 종속되어야 하는 구조에서 벗어난다. 모든 ‘왜’는 존재적 가치를 나누는데 물질적 가치도 함께 커지는 선순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는 그 자체가 답이다.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련되어 있던 내가 ‘나’를 만나는, 비밀스러운 발견이다. 연결된 세상에서 가치를 만드는 원리가 바로 여기에 숨어있다. 무한대로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의 성장이 가능해진다. 세상의 모든 한 사람 안에 감춰진 힘이며, 이것이 ‘왜’의 정체다. 건축가도 깨달았다. 악순환에서 벗어나 선순환으로 가는 실마리가 이미 자신의 ‘왜’ 안에 들어있었다.

내가 발견한 비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나 자신만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있을 때, 나는 반짝인다. 생명이 오직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정의해서가 아니라 내 ‘왜’가 바라보는 대상, 그 존재 없이 나를 정의할(찾을)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 생명의 원리가 가치를 만드는 세상이다.

‘왜’에서 출발한 조직화의 여행은 삶의 태도이자 일에 대한 태도이며, 관계에 대한 태도가 된다. 겉과 속이 같고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원리가 바로 이와 같다. ‘왜’는 일관된 투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나의 이유와 방향과 행동이 일관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롭다. 나는 이러한 우리를 살아있는 미디어, 연결을 만드는 주체로 정의했다(3). 미디어 개념의 틀을 깨고 살아있는 네트워크의 주체로 나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나는 자유롭다. 의식의 확장이 나를 더 넓은 나로, 더 넓은 세상으로 안내한다.

오직 단 한 사람에서 시작되는 시간은 더디고 느리다. 첫 뿌리를 내리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조직화되는 과정에 있다면 이미 길 위에 있다. 일과 삶과 존재가 하나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성장의 과정에 있다.

나도 내가 발견한 비밀을 전하는 과정에 있다. 각자가 가진 비밀이 스스로에게 발견될 수 있도록 돕는 것, 매개자로 촉매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발견한 비밀을 더 멀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래서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을 때까지. 당신의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 안에 감추어진 수많은 비밀들이 발견되고 펼쳐지고 서로에게 닿으며 합쳐지기를 원한다. 그 규모도, 속도도, 부(wealth)도 살아있는 네트워크의 원리를 따를 것이다. 이 글은 당연히 그에 대한 실천이다. 

3부(마지막 편)로 이어집니다. <[Why] ‘왜’를 찾아서 3편: 질문의 힘>

[각주]

  1. 윤지영, “미디어의 3요소,” 오가닉 미디어, 오가닉미디어랩, [2014] 2016, p.31-53.
  2. Georg Simmel,  Secret et sociétés secrètes, Strasbourg, Circé, 1991, p.22 (1906년 발표된 영어 원문은 여기)
  3. 윤지영, “에필로그, 연결이 지배하는 미디어 세상의 미래”, 오가닉 미디어, 오가닉미디어랩, [2014] 2016, p.290-299.

* 많은 공유와 피드백 부탁드리고 글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링크를 포함한) 출처를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인용 예시: 윤지영, [Why] ‘왜’를 찾아서 2편: 내가 찾은 비밀오가닉 미디어랩, 2023, https://organicmedialab.com/2023/08/02/why-in-search-of-why-part-2/

Aug 2, 2023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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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in: agnes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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