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돈의 작용 반작용 (Action and Reaction of Money) [Why] 돈의 작용 반작용 (Action and Reaction of Money)](https://i0.wp.com/organicmedialab.com/wp-content/uploads/2023/04/Why-tornado-of-money-2.png?resize=594%2C476&ss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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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다룬 존재적 빈곤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돈이다. 돈은 살아있다.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심지어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인류의 사회 관계는 돈을 매개로 형성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돈은 이 사회관계의 주인이자 질서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첫 번째 존재적 질문임과 동시에, 답을 찾아줄 매개체가 돈이다.
돈이 우리 삶을 지배해왔다는 사실은, 각자의 돈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벗어난다. 돈은 우리와 항상 같이 있지만(대출금도 돈이다), 눈으로 보고 셀 수 있지만, 돈의 작용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돈은 나와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동하고, 이 작동이 다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한다.
지금부터 돈의 신뢰작용, 중력작용, 지배작용을 차례대로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돈의 객관성, 등가성, 보편성을 돈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정의하고, 돈의 작용이 만드는 반작용을 결론에서 맺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로부터 돈을 분리해 내고, 돈의 실체를 밟고 서서, 여러분이 시작하게 될 새로운 질문을 목격하고자 한다.
돈의 신뢰작용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누구도, 차고 넘치는 어떤 정보도, 쉽게 믿기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나를 지켜줄 주체가 있는가? 흔한 말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돈뿐이다. 돈은 모든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대상과 관계로부터 나를 장기적으로 안전하게 지켜줄 수단이자, 그래서 목적으로 평가된다. 나는 아니라고 주장해도 이 사회적 질서가 동작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한, 그 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돈을 소유함으로써 얻는 개인적인 안정감은 어쩌면 국가적, 사회적 조직과 질서에 대한 신뢰의 가장 집약적이고 명백한 형식과 표현일 것이다. (…) 노동 생산물과 교환한 화폐(상징적 기호들)에 대한 구체적 대가를 공동체가 보장해 주리라는 확신”이다.(1)
전통적으로 화폐였던 돈의 개념은, 머지않아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링크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 표현과 교환의 방식이 변한다고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돈의 본질이 있다. 돈과 신뢰의 관계다. 돈은 첫째 신뢰를 전제로 하고, 둘째 신뢰의 대상이 되며, 교환과정을 거쳐, 셋째 신뢰의 결과를 차지한다.

신뢰의 전제
첫째, 돈의 교환 시스템을 보장하는, 조직에 대한 신뢰다. 교환가치를 국가에서 보장하든, 참여자들이 만드는 분산 네트워크의 유기체적 속성이 보장하든, 마찬가지다. 이번 달에도 연봉 계약서에 약속한 월급이 지급될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월세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일할 수 있고 잘 수 있다. 내가 제공하는 노동과, 회사가 약속한 돈이 합법적으로 교환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된다. 집주인 관점에서도 본인이 잠자리를 제공하면, 이에 상응하는 월세가 들어올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공간을 빌려준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월급이 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면, 그 즉시 회사와 내가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로 규정되고, 합법적으로 노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생긴다는 암묵적 전제가 있다. 집주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돈에 대한 믿음은 교환 시스템에 대한 신뢰이자, 그 시스템을 보장하는 조직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신뢰의 대상
둘째, 돈은 신뢰의 대상이다. 돈이 가진 위대한 성질, ‘객관성’ 때문에 가능하다. 돈은 그 어떤 객체의 가치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월세가 어떤 방식으로 내 통장으로 들어왔는지, 누가 어떻게 번 돈으로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번 달 대출이자를 낼 수 있는 돈이 통장에 꽂혀 있는지만 중요하다. 돈만이 믿을 수 있는 대상이며 실체다. 월세든 제품이든 서비스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간에, 돈은 모든 것을 매개하지만, 모든것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 돈은 양적으로 환산하고 계량화할 수 있으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직 돈만이 객관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객관성은 돈이 교환가치로서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돈 자체가 사물들의 가치를 기계적으로 반영하며 모든 사물들에 동등하게 제공되듯이, 화폐 거래에서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만 가치를 가질 뿐 그 어떤 사람도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2)
우리는 돈 앞에서 평등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돈을 많이 소유할수록 유리한 위치, 안정적인 위치,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직업과 신분, 특정 상황과 관계없이 모든 소유권은 돈을 많이 지불한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공평한가에 대한 수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상관없다. 돈은 모든 관점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자유롭다. 우리는 보다 안전하고, 공평하고, 자유롭기 위해 돈을 사용해왔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객관적인 가치는 오직 돈에게 부여되었다. 돈의 객관성은 사회 전체를 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관계, 오직 돈에 의해 매개된 관계로 만들었다. 여기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은 우리가 아닌 돈이다.
신뢰의 결과
셋째, 그래서 신뢰의 결과 자리는 돈이 차지한다. 제품, 서비스, 노동력 등은 돈으로 환산되어 교환이 이뤄지는 순간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돈은 가치를 입증하고 검증하는 매개체다. 양적으로 환산하여 더 높은 가치와 더 낮은 가치를 가르고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돕는다. 더 우수한 능력과 덜 우수한 능력을 분별하도록 동일한 기준으로 계량한다. 더 위에 있는 사람과 더 아래에 있는 사람의 위치를 정한다. 이들의 모든 상호작용은 돈으로 끝난다. 돈은 가치를 생산, 교환, 소유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 최종 결과물로 기록된다. 돈의 신뢰작용으로 얻게 된 가치는, 다름 아니라, 내가 획득한 돈이다.
돈의 중력작용
그래서 우리 삶의 수단인 돈은 목적으로 쉽게 승격된다. 이 현상은 돈에 대한 원대한 꿈, 누군가의 엄청난 욕구, 특별한 계급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참 작고 사소한 관계를 매개하면서 시작된다. 동료관계, 가족관계, 이웃관계, 친구관계를 만드는 매개체로서 돈이 개입되는 순간, 돈은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매개한 관계의 지배자가 되기까지.

훈훈함을 인색함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한적한 마을에는 인심 좋고 사이좋은 이웃들이 있다. 봄이면 푸르른 텃밭의 제철 채소도 나누고 음식도 만들어 나눈다. 그런데 왠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너무 많다고 느껴져 고마운 마음에 돈이라도 건네게 되는 순간, 관계는 복잡해질 수 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훈훈하고 사소한 행위가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텃밭을 가꾸는 삶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목적의 자리는 돈이 차지하게 된다.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인심 좋고 훈훈한 관계가 인색한 돈 관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두 이웃은 정말 많은 배려와 정성을 쏟아야 하는 과제를 얻게 된다. 이것이 돈이다.
존재를 비천함으로
돈은 이중적이다. 숭고하고도 천박하다. 돈이 삶의 목적이 되는 순간 아무리 소유해도, 끝내 도달하지 못할, 가장 숭고한 위치로 올라간다. 반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돈으로 환산이 가능해지는 순간, 모든 가치를 가장 낮은 곳으로 수렴시키는 돈의 ‘등가성’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목적이라고 발설하는 누를 범하지 않는다. 다만 돈의 질서에 따를 뿐이다.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옷과 집과 차를 사고, 여행을 가더라도 SNS에 자랑할 수 있는 경험을 선호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존재를 찾는다. 이 유형의 존재감은 타인에게 과시할 수 있을 때, 그래서 부러움이나 존중의 피드백을 받을 때 더 강력해진다. 돈은 수단이지만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종국에는 목적이 된다. 내 목표는 무엇인가? 비싼 브랜드 로고가 박힌 가방을 산 다음에는 반드시 사야 할 품목들이 더 늘어나고, 그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 돈이 더 필요하지만, 만족할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 실체(존재적 빈곤)의 무한 루프 때문에 (채워지는 것은 터져서 관리가 안되는 옷장 뿐이다) 목표는 계속 수정되고 가까이 가면 더 멀어진다.
돈의 등가성은 교환가치가 줄 수 있는 가장 낮은 바닥이 어디인지 알려주지만,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가장 높은 곳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더라도 계속 부족하고 더욱 고갈된 상태에 놓이게 되며, 내 능력으로 닿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저 위로 계속 목표를 수정한다. 하지만 끝이란 원래 없어서, 어느 지점이든 도달하면 다시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중력은 돈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매개로 내가 소유하려는 모든 가치, 내 삶에, 나 자신에게 작용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부족하다.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더 많이 드러내고 더 많이 소비해야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맛있는 것과 더 좋은 옷과 더 좋은 평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돈으로 산 모든 것들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 나의 정체성, 나의 잃어버린 존엄성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을 두고 매일처럼 소멸해간 인간의 존엄성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소유든, 낭비든, 교육이든, 기부든, 사랑이든) 상징이 되는 순간 가장 천박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만족을 불만족으로
모든 객체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 자신을 동등한 수준으로 동일시 함으로서 스스로가 돈의 등가성에 적용된 대상이 되도록 자처한다. 존엄성이 바닥으로 떨어질수록 욕구는 더 강해진다. 돈이 목적이 되든, 돈을 수단으로 나의 존엄성을 사고자 하든, 이 프로세스 안으로 들어가면 돈의 중력 작용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
짐멜(Simmel)은 이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욕구와 불만족의 관계를 지평선에 비유했다(3).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끝인 것 같지만 아무리 가까이 갔다고 생각해도 지평선은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지평선의 끝이란 본래 없다. 우리의 지각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실현되고 난 후에는 수단이 되고, 또다시 새로운 목적이 설정되는 과정, 채워지지 않고 무한히 반복되는 시행착오가 우리의 오늘이다. 다만 여기서 유한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다. 우리 모두는 지평선의 실체를 확인하기 전에 죽는다.
돈의 지배작용
이 과정의 반복이 낳는 사회관계는 피라미드 모양이다. 나의 현 위치가 좌표로 있고, 도달해야 할 지점이 있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는 돈의 지배작용이 양방향으로 동작한다. 한편으로는 지배와 종속의 사회적 계급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계급에 속하게 되든 이 계급 안에 있는 한, 그 누구도 스스로 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돈이 가져간 자유
그래서 가난과 부유함은 서로 닮아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의 절대적 결핍 상태이든, 경제적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주관적 가난이든, 가난은 자유의 반대말이다. 생존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도록 강요된다.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 주관적 가난도 마찬가지다. 내가 영위해야 하는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소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나는 가난하다. 생존적 결핍, 심리적 빈곤, 합리적 빚(대출), 이름표가 무엇이든 결과는 같다. 자유가 박탈된 불편한 상태에 놓여있다.
반면에 부자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다. 피라미드에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 가난해진다. 풍유로울수록 시간이 없다. 나 자신과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다. 그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해야 할 노동의 양이 나의 삶을 압도한다. 더 큰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돈으로 사기 위해 또 바빠야 한다. 바쁜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돈의 세가지 작용에 지배되는 한, 가난에서 역시 벗어날 방도는 없다. 서로에 대한 존중 대신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그렇다. 결국 믿을 것은 돈 뿐인 지경에 놓인다. 여기서는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 평균과 같은 기준점은 아무 소용이 없다. 타인을 지배하고 돈의 지배를 받는다.
돈이 만든 관계
돈의 지배작용은 그 범위를 끝없이 확장한다. 돈이 세상 모두의 가치 기준이 되기까지 넓혀진다. 돈이라는 교환가치로 환산함으로써 서로 다른 이해관계도, 개별적 특성도 통합이 가능해진다. 짐멜은 이것을 돈의 ‘보편성’으로 설명한 바 있다.(4) 돈의 가치로 사회를 통합하고, 따라서 사회적 관계가 통합된다. 우리는 하나의 가치, 하나의 관계를 기준으로 배열된다.
돈의 작용을 통해 우리 사회는 가치를 평가하는 보편적 기준도 갖게 되고 더 크게 통합되었다. 예측이 어려운 세상에서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갖게 되었고, 사회적 계급도 살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 성적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과 같다. 사소하고도 열심인 실천이 차곡차곡 쌓여, 이 사회는 곧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의 합이 되었다. 법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더라도 돈은 모든 질서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돈의 작용은 사람 골라가며, 관계를 봐가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갑과 을의 계약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중한 관계 안에 침투해 있다. 돈의 작용은 자연스럽게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나의 도움을 받아 살아있는 생명체로 성장한다. 물리적인 빚으로 매개된 관계, 그 빚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이 되게 만든다. ‘친구야, 다음엔 내가 살게!’,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잘 커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흔한 대화 안에도 돈이 흐른다. 나눔, 교육, 효도, 약속, 교환 등 모든 종류의 사회적 거래가 돈의 이동을 만든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책임과 의무, 권한 관계가 동등하지 않고 반드시 한 쪽이 일시적으로라도 빚을 진 주체가 되기 마련이다.
돈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정리해야 할 것은, 돈의 작용이 반드시 반작용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신뢰작용의 반작용은 사람에 대한 불신이다. 사람이 아닌 돈을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을 알 방법이 없고, 돈이 아닌 사람을 당연히 믿을 수도 없다. 그래서 여기는 믿을 사람 하나 없고 믿을 것은 돈뿐인 세상이다. 사람 대신 돈을 얻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우리는 고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돈에 대한) 신뢰의 반작용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결핍, 곧 내 존재의 결핍이다.
하지만 존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사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비참해진다. 스스로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도 같다. 그가 돈(이익)으로 환산되는 순간, 그 관계는 존재의 결핍에서 나를 구할 방도가 없다. 돈의 중력작용은 그래서 더 큰 결핍의 악순환을 낳는다.
우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그 비참함의 원인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질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성대로 돈의 질서를 따라, 피라미드로 줄을 서서 올라갈뿐이다. 의문에 맞서는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세상의 눈으로는 ‘생산적’이지 않다. 차라리 가면을 꺼내 쓰는 편이 빠르고 편리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결핍 상태를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 결핍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볼 수 없는 내가, 돈의 중력작용을 만드는 동력이다.

그래서 돈의 노예가 탄생한다. 타인을 지배하고 돈의 지배를 받는 반작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대가로 나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사람을 볼 수 없고, 어디서 나를 찾을지 질문하지 않으며, 지배함으로 지배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존엄할 수 있는가. 나의 존엄성을 어디 가서 얼마를 주고 사 올 것인가. 우리의 존엄함은 돈이 아닌, 우리가 만드는 ‘관계’ 안에 있는데. 그래서 방법은 하나뿐이다.
- (1) Simmel, G. (1930/2013). 돈의 철학 (김덕영 역). 도서출판 길. (원작: Philosophie des Geldes) (p. 272)
- (2) Ibid. (p. 755-756)
- (3) Ibid. (p. 386)
- (4) Ibid. (p. 596)
<다음 글: [Why] 직업의 종말 (End of Jobs)>
<추천 글>
- 윤지영, [Why] 프롤로그: 왜 ‘Why’인가? (Prolog), 오가닉미디어랩, 2022.
- 윤지영, [조직없는 조직화] 코인(coin)인가, 네트워크인가?,오가닉미디어랩, 2018.
- 윤지영, [Why] 어느 강아지의 산책 (A Walk of a Puppy Full of Curiosity), 오가닉미디어랩, 2023.
- 윤지영, 네트워크로 사라진 광고, in 오가닉마케팅, 오가닉미디어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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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예시: 윤지영, [Why] 돈의 작용 반작용 (Action and Reaction of Money), 오가닉 미디어랩, 2023, https://organicmedialab.com/2023/04/19/why-action-and-reaction-of-money/
Apr 19, 2023
Dr. Agnès Yun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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