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속으로 사라진 광고 (Advertising, fused into network)

네트워크 속으로 사라진 광고 (Advertising, fused into network)

[2016년 10월 16일 업데이트]

광고의 생태계는 복잡하다. 그래서 광고가 죽었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의사결정은 다르게 한다. 광고주, 미디어, 대행사, 제작사의 관계가 복잡한 것도 있지만 미련도 있다. 광고가 반드시 판매 목적은 아니라며 노출(view)을 지표로 설정하기도 한다. 효과 측정은 안되어도 영향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기 어렵다. 이미 예산이 있는데 가시적으로 실적을 보여줄만한 다른 방법도 별로 없지 않은가.

이 글에서는 광고의 소멸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본 뒤, 왜 이제 광고와 이별해야 하는지 네트워크 관점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전에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미디어 관점에서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1. 문제의 정의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 연결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미디어다. 콘텐츠의 생산자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광고가 필요한 ‘광고주’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봐주기를 원한다면 광고를 해야 한다. 내 의도와 관계없이 저절로 광고를 생산하기도 한다. 여기서 광고란 돈을 내고 지면을 사는 방식이 아니다.

오가닉 미디어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미디어다. 그러므로 나의 콘텐츠를 광고하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타인을 미디어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 뿐이다. 이 때 나의 콘텐츠는 그를 통해 그의 청중에게 도달한다. 광고된다. 나도 같은 방식으로 동작한다. 그 결과가 네트워크다. 내가 그의 청중과 그리고 그가 나의 청중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서로 열어주는 것이다.

오가닉 미디어는 네트워크다. 콘텐츠를 생산하고 광고하는 역할은 혼자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상부상조해야 미디어로서 존재할 수 있다.

나의 콘텐츠를 광고하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타인을 미디어로 존재하도록 도와주는 길 뿐이다. 나의 광고가 콘텐츠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다른 미디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유할 가치가 있는 콘텐츠는 그를 통해 그의 청중에게 도달된다. 광고된다. 서로 같은 방식으로 동작한다. 그 결과가 네트워크다. 내가 그의 청중과, 그가 나의 청중과 연결되면서 뗄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오가닉 미디어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미디어다. 타인의 노동력 없이는, 타인의 콘텐츠 없이는 나도 미디어로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멋진 사진으로 팔로워를 늘리고 서로 부지런히 관계를 이어간다.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활동이 일종의 광고인 것이다.

광고의 의도가 없더라도 내 일상의 경험은 타인에게 콘텐츠(정보)가 되고 이 때 나는 미디어로, 내 경험은 누군가의(또는 어떤 제품의) 광고로 전환될 수 있다. 음악을 듣는 행위도 앨범을, 작곡가를, 연주자를 광고할 수 있고 이 때 나는 미디어고 DJ다(ex. Amazon music). 이렇게 만들어지는 관계가, 경험이, 신뢰가,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의 미디어이고 광고다.

amazon-alsolistened-to-10-2016

만약 사용자 행위를 기반으로 추천을 한다면 순도 100%여야 한다. 연결의 경험이 신뢰를 만든다.

이 메커니즘안에 광고의 소멸이 있다. 미디어이자 광고주(Advertiser)로 작동하는 오가닉 미디어의 양면성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미디어의 거스를 수 없는 진화인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광고의 소멸 과정을 단계별로 알아보고 그 결과에 대해 논의하겠다.

2. 콘텐츠와 광고의 공생

콘텐츠와 광고는 공생했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되어왔다. 어느 것이 광고이고 어느 것이 선한 콘텐츠인지 구분했다. 미디어 입장에서는 광고에 어느 정도까지 판매 효과가 있는지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노출이 임무였고 주목을 끌어줬다면 그것으로 지표는 충분했다.

전통 미디어는 간밤에 일어난 소식도 우리 대신 알아봐 줬고 먼 나라의 패션 트랜드도 전해줬다. 유용한 정보에 소비자가 모였고, 우리는 충성했다. 반면 전통 미디어의 활동은 광고주의 제품을 알리기 위한 활동이기도 했다. 매달 잡지를 찍어야 공간을 팔 것이 아닌가. 공간의 단가는 콘텐츠 소비자의 숫자가 정해줬다. 물론 광고도 우리의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매개체로 작동했다.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를 때는 ‘메이커’를 샀으니까.

꼭 정보가 아니어도 광고는 소비자를 울리고 웃기면서 소비사회에서 당연하게 자리 잡았다. 콘텐츠와 광고는 공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이중생활은 정당했다. 우리는 받아들였다. 그들의 생활은 꽤 오랫동안 평화로웠다(1).

전통적 미디어에서 콘텐츠와 광고는 분리된 것이었다.

콘텐츠와 광고는 분리되어왔다.

3. 광고의 존재 이유를 찾아서

그런데 콘텐츠(모든 것)가 넘쳐나자 전통 미디어에 대한 소비자의 의존도는 떨어지고 광고 공간으로서의 가치도 하락했다. 무엇으로 주목을 끌고 무엇을 팔지 고민에 빠졌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전통 미디어와 광고주의 기본적 자세는 광고의 주목도와 도달의 규모를 높이기 위해 더욱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1) ‘광고지만 괜찮죠?’

광고를 갖가지 방식으로 덕지덕지 붙이고 들이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길게 언급할 가치는 없겠다(컨텍스트에 답이 있다). 대표적인 전략은 콘텐츠와 광고를 하나로 합체시키는 것이다. 첫째, 광고를 공유될만한 콘텐츠로 승격시켜 입소문을 통해 널리 전파시킨다. 이 관점에서는 ‘콘텐츠 같은 광고’, ‘광고인 줄도 모르고 끝까지 봤네’ 등의 반응을 이끌어내면 성공이다.

안티팬의 눈물샘까지 자극한 현대자동차의 ‘고잉홈‘은 천만 조회 수를 달성했다. 최현석, 안정환이 등장한 캐논 광고처럼 광고인 줄 알고도 너무 재밌어서 친구까지 소환해서 같이 보는 경우도 있다. ‘이거 광고에요’를 외쳐서 더 웃긴 작품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보는 유병재 주연의 올레 와이브로 에그 광고(제작사 ‘돌고래유괴단‘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한다).

72초 TV도 고유의 즐거운 문법을 그대로 광고에 적용하여 새로운 시도들을 쏟아내고 있다. 크리에이터들은 우리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고 광고주는 돈이 있다. 이들의 협업은 당연하다. 그러나 ‘광고 아니에요’를 외치는 광고, 광고를 조롱하는 광고, 스스로 망가지는 광고의 코드들은 광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광고를 광고라고 부를 수 없는 현실. 공간에서 네트워크로 그라운드가 넘어가는 전환기에 광고와 콘텐츠를 구분하기 어려운 교집합 영역이 점차 커지고 있다.

공간에서 네트워크로 그라운드가 넘어가는 전환기에 광고와 콘텐츠의 교집합은 커지고 있다. 광고를 광고라고 부를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다.

2) 도달, 막다른 골목

이런 광고의 성공 여부는 ‘도달(reach)’ 규모로 결정된다. 광고주, 대행사, 미디어 모두의 목표이고 성공 지표다.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을 골라서 타깃 광고를 하든, 더 큰 규모의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을 하든 모두 도달 규모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MCN의 비즈니스 모델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지만 기반은 광고다. 유투버의 팬 중에는 공짜로 좋은 영상을 보는데 차라리 ‘건너뛰기(skip)’ 누르지 말고 더 길게 광고를 봐주자(댓글)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광고 차단 소프트웨어는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되고 있고 광고주와 소비자의 쫓고 쫓기는 전쟁은 이미 오래되었다.

여기서 광고의 목적이 도달이 된 당연한 이유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도달은 판매를 위한 중간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전통적 광고를 통해 제품을 인지하면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광고의 임무가 도달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단순한 도달은 판매로 이어지지 않는다. 제품의 인지와 구매 사이의 간격은 너무 넓어졌다. 검색을 하든 링크를 클릭하든 우리는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무의식중에 발생하는 의사결정의 연속이며 그 자체가 다시 서로의 의사결정을 돕는다. 네트워크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광고가 구매 결정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광고를 한다면, 지불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의사결정을 도울 뿐 아니라 구매까지 끊김이 없이 연결되는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고 효용을 논하기 어렵게 되었다.

3) 효과, 지속 가능한가?

연결된 세상에서는 단발성 광고도 독립적인 콘텐츠가 아니다. 고객, 경험, 제품의 네트워크와 함께 움직인다. 지난 6월 화장품 회사 ‘지베르니’는 광고 영상과 메가박스 상영관의 객석을 연결하는 기발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였다(제작사: 플래닛드림). 바이럴은 급속도로 번졌고 (광고 관계자에 따르면) 매출도 상승했다고 한다. 성공한 광고가 낳은 결과인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화장품 리뷰 서비스 ‘글로우픽’에는 해당 제품에 대한 사용자 리뷰만 400개가 넘는데, 대부분의 글은 이미 광고 이전에 작성되었다.

즉 제품에 이미 팬이 있고(sticky), 이를 기반으로 입소문이 확산되는 단계에 있다면(viral), 네트워크 규모를 키우기 위한 비용 집행도 정당하게 고려될 수 있다[바이럴 확산의 공식, Sticky-Viral-Paid,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 하지만 인지(awareness)와 구매의 직접적인 관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광고는 팬과 제품에 대한 경험과 연결된 또 하나의 노드일 뿐이다. 광고 크리에이터들이 주는 놀라움과 창의성이 설령 천일야화처럼 계속될 수 있다는 가정이 있더라도 말이다.

구매후기를 통해 제품을 구매하고 다시 후기를 남기는 선순환을 볼 수 있다. 지베르니 제품의 경우 대부분 극장 광고 집행 이전에 생성된 리뷰들이다.

글로우픽에서는 구매후기를 통해 제품을 구매하고 다시 후기를 남기는 선순환을 볼 수 있다. 페이스북의 ‘Sponsored’ 포스트가 아무리 칭찬 일색이라도 여기서 리뷰를 재검색하고 검증된 후기를 서로 남겨주기도 한다.

4. 광고의 소멸

‘콘텐츠가 된 광고’는 광고의 소멸을 알리는 시대적 현상이다. 사업영역에 따라 광고의 영향 범위가 다르므로 이미 완전히 소멸한 영역, 가장 늦게 소멸할 영역이 존재할 것이다(예를 들어, P&G). 그러나 언젠가는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풍요의 세상에서 상품으로서, 마케팅 수단으로서 설득 광고를 소비해줄 ‘대중’은 없다.

콘텐츠는 광고가 되고 광고는 콘텐츠가 되면서 이 둘을 구분하기는 어려워졌다. 크리에이티브가 아닌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콘텐츠와 광고를 분리해내기 위한 수많은 개념, 반면 분리되지 않으려는 광고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동시에 쏟아진다. 네이티브 광고, 애드버토리얼, ‘Sponsored by’, ‘Promoted by’, ‘Featured by’ 등 신문 지면이든, 온라인 상점이든, 검색 결과 페이지든 수식어와 라벨은 계속 생겨난다. 기자가 같이 만들었느냐, 공간만 내준 것이냐, 정보냐, 기만이냐의 논란도 따라간다. [양윤직, 광고와 컨텐츠는 하나, 네이티브 애드 시대]

연결된 세상에서 비즈니스의 목적은 돈(매출)에서 신뢰로 이동하고 있다. 광고도 같은 원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네이티브 광고(Native Advertising)’의 라벨들은 ‘콘텐츠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광고, 즉 돈을 지불한 댓가로 이 자리에 있으니 판단은 소비자가 하라’는 뜻을 함축한다. 문제는 여기 혼합되기 어려운 두 가지 가치가 공존한다는 데에 있다. “돈은 ‘비천한’ 것이다[게오르그 짐멜, 돈이란 무엇인가, 김덕영 역, 도서출판 길, 2014, p. 69.]” 돈의 등가성은 돈으로 지불 가능한 것들의 가치를 가장 낮은 곳으로 수렴시킨다(2). 반면 평판, 신뢰, 권위는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쇼핑몰에서 ‘Sponsored by’ 항목은 천대받지만 진정성 있는 사용자 리뷰는 환대받는다. 버즈피드보다 뉴욕타임즈의 네이티브 광고가 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도 같다.

방법은 돈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신뢰를 쌓는 것뿐이다. 네이티브 광고를 게재하는 전통 미디어나 돈을 내고 콘텐츠를 보탤 자격을 얻은 기업(조직)이나 마찬가지다. 미디어는 오랫동안 쌓아온 평판과 신뢰를 걸었고 기업은 (기회)비용을 걸었다. 그렇다면 기업의 콘텐츠는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까지가 궁극의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5. 네트워크가 된 광고

이 맥락에서 어디까지를 콘텐츠, 어디까지를 광고라고 할 것인가? 지속가능한 네트워크(를 만드는 주체)가 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광고가 아니지 않은가. 연결된 세상에서 우리(고객)가 생산하는 모든 콘텐츠는 서로에게 세상을 알려주고 의사결정을 도와주며 함께 즐길 수 있는 매개체다. 달리 말하면 광고에서 멀어질수록 신뢰를 얻는다. 돈보다 관계가 우선이고 신뢰라는 귀한 가치를 얻기 위한 지루한 과정이 곧 광고가 된 것이다.

연결된 세상에서는 지속 가능한 힘이 없으면 무엇이든 소멸한다. 지속 가능함은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결과는 네트워크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는 노드로서, 링크로서, 나아가 네트워크로서 존재한다[연결을 만드는 콘텐츠의 본질, 그리고 4가지 유형].

이것을 이해한 브랜드들은 제품의 소비 가치보다 ‘참여’ 가치에 집중한다. 지속가능한 팬을 만들고 이들이 미디어로서 가치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널리 알려진 코카콜라의 ‘Liquid and linked content’는 고객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결’ 전략이다. 살아있는 이야기, 체험, 이벤트의 합이 곧 브랜드라는 것을 실천하는 사례다[브랜드는 네트워크다]. 샤오미처럼, 코카콜라처럼 설득이 아니라 공감을, 체험을, 연결을 만드는 것이 기업 활동의 목적이자 전략인 것이다[샤오미와 비즈니스의 사회적 진화].

여기서는 네트워크가 곧 제품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브랜드 저널리즘’도 주목(바이럴)을 위한 것인지, 전통 미디어의 역할을 하려는 것인지, 가치를 찾고 배우는 과정을 일관되고 꾸준하게 실천하려는 것인지, 즉 고객과 분리되지 않는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것인지에 따라 그 운명을 달리 할 것이다.

검색 결과 페이지의 링크를 사든, 전통 미디어의 기사 공간을 사든, 유튜버의 화면을 사든, 회사에 뉴스룸을 만들든 마찬가지다. ‘Sponsored’와 ‘Earned’는 연속선상에 있다. 단순히 노출과 주목을 높이기 위한 접근이라면 오른쪽 영역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고객과 함께 지속 가능한 가치를 함께 만들고, 그 결과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광고가 아니다.

6. 결론: 이별의 시간

지금까지 광고의 소멸을 논할 수밖에 없는 이유, 네트워크로 융해된 광고에 대해 알아보았다. 오픈소스, 클라우드, SNS에 연결된 세상에서 생산, 유통, 마케팅의 기회는 많고 장벽은 낮아졌다. 서로의 활동이 자양분이 되는 이 연결의 세상은 곧 무엇이든 넘쳐나는 풍요의 세상이다. 여기에는 많은 기회와 고민이 공존한다. 한편으로 보면 돈 없이도 누구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희소한 가치를 만들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생산이 곧 가치가 되던 시대가 이제 가고 없다.

이제는 시간, 경험, 신뢰와 같이 돈으로 살 수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는 것들이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시간을 절약해주고, 좋은 경험을 주고, 그 결과 신뢰를 쌓는 과정에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비즈니스의 희소가치는 이 네트워크에 있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 상업적 광고는 무력하다. 아직 잔재가, 미련이 남아있지만 광고가 이미 소멸했음을 받아들여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광고주, 대행사, 제작사, (전통)미디어가 스스로 전통적 가치사슬을 끊고 나와야 한다. 서로의 번뜩이는 전문성을 이미 소멸한 ‘광고’를 만들고 퍼뜨리는데 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신제품을 알리는 데에 광고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 신제품이 출시된 시점에 이미 팬이,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왜 오가닉 마케팅인가?]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신(新)’제품은 새롭지 않다. 제품은 네트워크와 분리되지 않는 유기체다. 제품을 매개로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이지 제품 자체가 아니다. 광고가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 네트워크가 광고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우리는 이미 그 시점에 와있다. 이제 그만 이별을 하자.

<추천글>

(1) 광고의 정의, 그리고 미디어와 광고의 공생관계는 ‘경험이 광고다‘에서 먼저 다루었다.

(2) “돈은 비천한 것이다. 왜냐하면 돈은 모든 것에 대한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만이 고귀한 것이다. 여러 가지 것들에 동일한 것은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가장 높은 것도 가장 낮은 것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수평화는 곧바로 가장 낮은 요소의 위치로 귀결되는 것, 이것은 모든 수평화의 비극이다.”(ibid., 69~70쪽)

* 글을 인용, 참고하실 때에는 반드시 (링크를 포함하여) 출처를 밝혀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October 4, 2016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facebook: yun.agnesorganicmedialab
Twitter: @agnesyun
Linkedin: agnesyun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