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시간의 재발견: 해피엔딩의 함정 (Time Trap of Happy Endings)

[Why] 시간의 재발견: 해피엔딩의 함정 (Time Trap of Happy Endings)

<이전 글: [Why] ‘왜’를 찾아서 3편: 질문의 힘>

째깍째깍.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사는 것처럼 시간은 들리지 않아도 항상 흐르고 있다. 내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숨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한,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과 끝이 있는 일생에서 흐르는 시간은 떼어낼 수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우리 삶은 과거와 기억이 있고, 미래와 계획이 있고, 유년과 노년이 있는 시간의 기록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은 우리 삶의 규칙이자 리듬과 질서, 평생을 이끄는 주인과도 같다. 밀고 가는 시간, 따라가는 시간, 쫓기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의 선형성 안에 우리의 사고가, 존재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시계가 멈추었다. 시간의 선로 밖에 서게 된 나는 시간의 소리를 들었다. 쿵쾅쿵쾅, 들리지 않던 소리가 요란한 굉음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나의 잘난 삶 전체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이 아니라, 그 굉음을 견뎌온 낭비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의 벽에 놓인 것처럼, 더 가야 하는데 갈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를 싣고 달리는 기차가 시간의 선로를 따라 달아나듯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문득 깨닫게 된 것은 남겨진 내가 아니었다. 바로 이때였다. 그 시간의 기차가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알아낼 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내가 잊고 지내왔지만 사실은 갇혀 있었던 시간의 법, 시간의 굴레 안에 충실해온 나를 보았다. 생산성과 효율성, 계급의 피라미드와 미래지향적 가치의 법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합의한 시간의 법 아래 우리를 보았다. 시계 소리가 멈추고 무한한 정적이 흘렀다. 무한한 시간, 영원의 시간을 보았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시간, 절약해야 하는 시간, 벌어야 하는 시간, 희소한 자원이자 주인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구해야 할 시간,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함께 만들어야 할 시간,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함께 창조해야 할 시간을 보았다.

하나씩 풀어가려면 현상에 대한 인식이 먼저일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새로 정리하고 네트워크 세상에서 가치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시간 관점에서 이어갈 것이다. 몇 편의 글이 시리즈로 필요하다. 여기서는 가장 먼저 선형적 시간의 굴레에 대한 인식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의 법을 물리적 시간, 사회적 시간, 경제적 시간의 관점으로 나누어서 각각 살펴본다. 이를 통해 선형적 시간의 쟁점을 이해하고, 다음 글에서 각자의 ‘왜’로부터 시작되는 시간, 함께 구해야 할 시간을 펼칠 수 있는 준비를 할 것이다.

첫째, 물리적 시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은 태생부터 선형적이다. 착착 앞으로 간다. 자연의 섭리이자 우리에게 벌써부터 주어진 시간이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봄은 대기 중이다. 시간이 되면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에 기적처럼 초록이 돋는다. 한 해도 거르지 않는다. 이토록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며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인식하고 세상을 인식하고 자연의 달력 안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태어나고 크고 관계 맺고 늙고 죽는다. 우리 생명은 물리적 시간의 법 아래에 있다. 세상에 제아무리 돈이 많고 똑똑하고 대단한 그 어떤 존재도 이 물리적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우리에게 자연의 섭리를 가르쳐준 시간.

인류의 역사는 그래서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의 결정체다. 문명을 이끌어온 모든 발명이 그렇다(1). 파피루스의 발명은 인류의 3천 년을 기억하는 역할을 했다. 종이가 나오기전까지 전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만 들을 수 있었으니 잠자고 있는 세상의 비밀이 아직도 탐험가들을 통해 발견되고 해석되는 중이다. 전기의 발명은 낮과 밤의 시간을 뒤바꾸고 밤을 새우며 일하고 쉬지 않고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라디오와 TV 매체는 소식을 알리는 수준을 넘어 인류가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을 선별하고 의식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발명이 되어주었다. 지금은 온 세상이 실시간으로 서로 아는 것을 앞다퉈 전하기 바쁘다. 이대로는 정보인지 쓰레기인지 데이터가 너무 심하게 쌓여 머지않아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될테니 우리의 발명은 더 나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저장하고 알리기 위해 계속 될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 시간을 사는 인류의 역사다.

둘째, 사회적 시간

물리적 시간 안에서 우리는 날짜를 만들고 시계를 만들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다. 물리적 시간을 용도에 맞게 쪼개고 라벨을 붙인 것이 사회적 시간이다. 서로 공유하는 시간을 기준 삼아 소통하고 협업하고 관계 맺는다. 줌으로 연결된 시간, 출퇴근의 시간, 9시 뉴스 시간, 점심시간, 수업 시간, 겨울방학, 크리스마스의 시간에 반복되는 리듬이 있고 따라야 할 규칙, 규범, 관습이 있다. 사회적 시간은 장사와 소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감사보다 거래와 영업의 시간이 된 명절, 새해 떡국처럼 이제 슈톨렌을 먹어야 하는 연말, 사랑 고백의 그레이드(grade)를 만든 발렌타인데이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간, 마케팅의 시간, 더 많은 라벨을 만들어야 하는 의욕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회적 시간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공통의 기준을 만든다. 오래전에는 공유되는 시간이 동네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분절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겹겹이 우리 삶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갑옷처럼 내 몸을 단단히 조이고 있다. 함께 살기 위한 서로의 약속이 문제는 아니다. 반복되는 경험(practice)은 의식의 틀이 되고 그 틀 안에서만 모든 것이 납득된다. 순응하는 것이 가장 사회적이다.

물리적 시간과 달리 사회적 시간은 우리 스스로 만들었는데도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과 끝으로 구성된 모든 구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고 쪼개고 쪼개도 고갈되지 않는다. 탄생부터 오늘, 입학부터 졸업, 회의의 시작과 끝, 결혼생활의 시작과 끝(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 같이 했더라도 끝은 온다),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 휴가의 시작과 끝, 주말의 시작과 끝과 같은 크고 작은 어젠다를 평생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제발 답을 하라고 쏟아지는 각종 SNS 알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원래 없었다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시간을 그만 받아들이라고 한다. 언제나 대기 중, 보류 중, 처리 중이다. 더 투명하고 더 구차하고 더 사소한 이벤트의 합이 실시간으로 누구에게든지 전해진다. 처음과 끝이 너무 잘게 쪼개져서 아예 보이지 않는 시간, 사회적 시간은 이제 처음과 끝이 인식되지 않는 전지구적 동거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성장과 함께, 노화와 함께 주어진 시간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처럼, 삶의 스케줄표에 따라 죽을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안에 내가 있다. 사회적 시간이 만든 것은 시간의 노예가 아니다. 서로의 노예다.

셋째, 경제적 시간

이는 당연히 경제적 시간의 법을 낳는다. 사회적 시간은 선형적 시간을 더욱 강력한 경제적 자원이자, 도구, 심지어 목표, 최상의 가치로 승격시키는 기반을 만들었다. 달리기와 같다. 더 빨리 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성공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큰돈을 만드는 것인데, 이때 시간은 돈이다. 경제적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는 시간, 함께 일하면서 절약해야 하는 시간, 노동의 시간이다. 이제는 시간을 버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없다. 럭셔리 여행이나 힐링 프로그램처럼 시간을 잘 쓰게 해주는 각종 비즈니스가 흥행한다. 모든 것이 풍요로 넘치는 세상에서 이제 희소한 것은 오직 시간뿐이며, 이를 줄여줄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모든 조직이 만들어야 할 가치가 되었다.

시간을 잘 채우는 것이, 잘 쓰는 것이, 멀티태스킹도 하고 아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치를 만드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벗어나면 왠지 하찮게 보인다. 바쁜 것이 능력이다. 뭐든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러한 시간의 선형성에 기반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고 늘 새로운 일이 그 위에 쏟아진다. 깊이 질문할 시간은 사치스럽다. 빨리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백은 없으므로 문제보다 실행이 먼저가 된다. 가치도, 이유도, 목적지도 이미 정해져 있다. 시간이 있고 내가 있고, 일이 있고 가치가 있으며, 목적이 있고 관계가 있다.

시간은 삶의 굴레가 아니라 선형적인 사고의 틀로써 온전히 나를 지배하게 된다. 경제적 시간에는 앞과 뒤만 있고 옆이 없다. 쏜살같이 지나는 선형적 시간의 기차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처럼 앞으로 가는 사람들, 나보다 빨리 가는 사람들, 시간이 갈수록 더 가까워지는 다음 정거장 뿐이다. 시간이 실체라면 그 안에 갇힌 사고는 우리가 만든 시뮬레이션이다.

이에 대한 방증은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경제적으로 자유를 얻게 되면 시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서 유유자적) 존재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주식투자를 하고 코인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이 돈으로 통일된 것처럼 시간도 돈이 되었다. 그러나 돈의 작용과 반작용에서 살펴본 것처럼 돈은 자유를 사주지 못한다. 사회적 시간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도 사고의 틀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시간이 기준이 되면 될수록 존재적 자유의 고갈 상태는 오히려 인식조차 어려워진다.

경제적 시간은 우리를 더욱 좁은 길로 인도한다. 시간이 주어진 자원이자 질서이자 약속이자 목적이 되었으니 시간의 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다. 질문도, 가치도, 관계도 모두 시간의 존재 안에 소멸되었다. 대신 달리는 시간의 기차 안, 오직 선형적 사고의 틀 안에서 세상을,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가 있다. 돈이 된 시간을 기준으로 모든 관계가 자라나고 평가됨에 따라 경제적 시간은 거꾸로 사회적 시간의 틀이 된다.

시간의 법칙은 우리의 사고에서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차원으로 진화해왔다.
진정한 굴레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쌓아온 선형적 사고의 틀 안에 있다.

해피엔딩의 함정

두 시간 내내 악당에게 쫓기고, 경찰에 쫓기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고 있다. 푸르게 아름다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한 척, 그녀는 홀로 머릿결을 흩날리며 저 멀리 응시하고 있다. 또는 바닷가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편하고 느리게 한잔하고 있는 유쾌한 모습이어도 좋겠다. 해피엔딩의 클리쉐다. 구구절절 설명 안 해도 영화가 묘사할 수 있는 주인공의 가장 큰 자유를 암시한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며 맘 편히 화면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장면은 꼭 악당이 아니어도, 바쁜 빌딩에서, 끝없는 줌 미팅에서, 쏟아지는 카톡 알림에서, 쫓기던 삶에서 벗어난 극도의 자유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는 꿈같은 삶도 여전히 시간의 굴레 안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선형적 시간의 법은 시간의 노예일 때도, 벗어난 것 같을 때도 우리의 모든 가치체계와 의식을 여전히 지배 중이다. 세상이 변해도, 의식은 갇혀있다. 시간의 굴레 안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의식의 굴레가 있다.

시간의 재발견

하지만 필사적으로 앞으로 가려는 선형적 사고 안에서 만들 수 있는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한하다. 심지어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왜소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가두고 우리가 쫓아가면서 더 비좁은 의식, 더 숨 가쁜 하루, 더 벗어날 수 없게 된 오늘은 현실인가, 스스로 만든 시뮬레이션인가? 끊임없이 사회적 시간을 경제적 시간으로 환산해가면서 하루를 꾹꾹 눌러 담으며 살고 있는 오늘은 주어진 현실인가, 내가 만드는 결과인가?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 세상에서 내 선형적 사고가 볼 수 있고 의식할 수 있는 범위는 얼마나 비좁은가?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시간성은 기본 값이 되었지만 여기서 가치가 무엇이며, 가치를 만드는 시간을 어떻게 선형적 사고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그 동작원리를 배우지도, 그러니 체험하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체득된 것은 오직 선형적 시간의 틀, 사회적 시간과 경제적 시간이 함께 극대화시킨 선형적 사고의 틀이다. 틀이 무서운 이유는 아무리 밖에서 벽을 허물어줘도 정작 나는 꼼짝도 못하기 때문이다. 힘을 꽉 주고 있는 근육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의 틀이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잠시 멈춰 생각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뮬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도 내게 있다. 여기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흘러서 지나가는 시간, 아껴서 써야 할 시간이 아니라 함께 구해야할 시간이 있다.

주제는 시간의 자유가 아니다. 선형적 시간의 논리 안에서 노예 상태를 벗어나라는 메시지였다면 이 글을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를 지배해온 선형적 시간의 틀을 깨고, 내 안에 있던 ‘왜’를 깨워, 관계를 통해, 서로 도움을 통해, 도움 받기를 자청하고 도움 주기를 넘치게 할 수 있는 그 관계 안에서 조직화되는 우리 자신을 보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시간으로 갈 것이다.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치를 만드는 원리가 여기 있다. 시리즈의 결론에서 ‘네트워크의 시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자.

<이어지는 글: [Why] 시간의 해체: 데자뷔에서 유레카로 (From Deja Vu to Eureka)>

<각주>

  • (1) 윤지영,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본 미디어의 역사], 오가닉 미디어, 2016(초판 2014), 오가닉미디어랩, 180-197쪽.
  • (2) 윤지영, [광고의 소멸, 이별의 시간], 오가닉 마케팅, 2017, 오가닉미디어랩, 49-64쪽

<추천 글>

* 많은 공유와 피드백 부탁드리고 글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링크를 포함한) 출처를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인용 예시: 윤지영, [Why] 시간의 재발견: 해피엔딩의 함정오가닉 미디어랩, 2023, https://organicmedialab.com/2023/12/13/time-trap-of-happy-ending/

Dec 13, 2023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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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in: agnes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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