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악순환의 해부학 (Anatomy of Vicious Cycles)

[Why] 악순환의 해부학 (Anatomy of Vicious Cycles)

<이전 글: [Why] 직업의 종말 (End of Jobs)>


명절이면 정말 균일하게 크고 반짝이며 색깔도 너무 고운 사과와 배가 택배상자에 실려 전국으로 배송된다. 그러고 보면 과일들이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크기와 당도로 열려서 매년 날짜도, 날씨도 달라지는 명절에 선물상자에 공산품처럼 담기려면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농약 성분인 성장촉진제를 맞고, 붉게 반짝이는 사과를 위해 착색제를 바르고, ‘당도를 맞춰서 오라’는 마트의 요청에 따라 딸기에 ‘작업’을 해야하는 현실은 농부의 잘못일까, 마트의 잘못일까, 내 잘못일까, 과일 잘못일까. 자연의 섭리대로 짓는 농사는 점점 더 귀해지는 세상이다.

농산물만은 아니다. 장보기를 할 때 나는 앞면보다 뒷면을 먼저 본다. 앞면에는 분명히 “한 방울까지 그대로 착즙”했는데 뒷면에는 합성향료와 농축액으로 맛을 냈다는 정보가 정말 작은 글자로 쓰여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잠봉과 프로슈토에는 색소와 보존제 역할을 하는 아질산나트륨이 포함되어 있다고 꼭 뒷면에서만 말을 해준다. 잊고 있다가 1급 발암물질이라고 보도가 될 때마다 사람들은 처음처럼 놀란다. 나처럼 ‘유난을 떠는’ 사람들은 참 인생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도대체 상상하기 어려운 인공첨가물이 모든 식품에 들어가 있고 내 몸에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불편해도 어쩔 수가 없다.

먹을 것은 넘쳐나는데 믿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없어지는 세상이라니, 100세 시대라는데 우리가 생산하고 또 섭취 중인 환경 호르몬으로 질병은 더 많아진 세상이라니, 음식쓰레기를 어떻게 잘 버릴까 고민해야 하는 풍요의 시대에, 80억 인구가 다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 시대에, 세계의 절반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니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1). 누구 한 사람, 어느 한 기업, 어느 한 국가, 어느 한 현상에서 원인을 찾기에는 그 뿌리는 깊고 복잡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악순환은 사소한 식탁부터 인류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삶 속에 악순환이 고요하게, 하지만 쉬지 않고 가동되는 동안 정보는 왜곡되고 분절되고 가려져(통제와 조작) 악순환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물에 물 탄 듯 결론 없이 끝이 난다. ‘불편한 진실’과 왜곡된 진실공방, 음모론과 마케팅, 기업 홍보용 기사와 논문 사이 어딘가에서 실체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에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는 악순환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악순환이란 불현듯 나타나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 결합하고 이용하고 연결하고 커지면서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드는 속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그리고 어떻게, 악순환이 돌아가는 가속도를 멈출 힘을 낼 수 있을까.

악순환의 생태계

이 글의 목적은 악순환의 원리를 정리하는 것이다. 악순환 속에서 소멸하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악순환을 무력화시키고 선순환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선순환의 원리를 이해하는 실천과 적용이다. 연결이 지배하는 네트워크 세상에서 ‘나’의 힘은 오히려 강력하다. 다만 규모를 만들 수 있는 원리, 시간을 창조하는 원리가 필요할 뿐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다루기에 앞서 이 글에서는 악순환을 해부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한다.

우리는 운명공동체다

악순환은 돈이 목적인 세상에서 쉽게 조직화된다.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돌이키기도 쉽지 않다. 가속도는 연결된 세상에서 더 빠르다. 세상을 이끄는 악순환은 돈을 목적으로 시작해서 돈의 원리를 따라 모두가 움직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돈을 결과물로 나눠갖는 방식으로 커진다. 그런 악순환이 물질의 가치를 중심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세상의 권리를 가진다. 돈과 권력/권위를 자원으로 기업, 정치인, 정부기관, 학자, 전통미디어, 국민, 소비자, 일하는 내가 참여하는 먹이사슬이다.

악순환은 앞에서 설명한 ‘돈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커진다. 돈(물질적 가치)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때 신뢰의 대상은 돈이 되고, 돈을 좇는 과정을 거쳐 돈에 복종하는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돈이 나를 지배하는 단계에 이르면 오히려 합리화를 통해 악순환을 더욱 키운다. 돈을 목적으로 진실이 왜곡되는 악순환의 성장 사이클이다. *돈의 신뢰작용, 중력작용, 지배작용은 앞선 글 참고.

감출수록 드러나는 법을 가진 네트워크 세상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정보는 여전히 통제되고 진실이 드러날 수 있는 근원은 차단되거나 흐려지거나(의도된 논문 등) 부정된다.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 등 어디든, 소위 연결된 세상을 만들어온 주체가 된 플랫폼에서도 모든 비판적 사고는 알고리즘 조작으로 삭제되거나 통제되기도 한다. 먹이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있던 우리는 소위 라디오 시대의 ‘대중’처럼(2) 이에 순종함으로 대규모로 참여한다. 장기적 부작용이 확인되지 않은 백신도 앞다퉈서 맞고 심지어 자랑까지 할 수 있도록 전 인류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내 삶을 움직이는 모든 악순환은 우리가 참여해야만 발생하고 성장한다. 코로나처럼 극단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전 인류에 급격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고 기후변화처럼 오랜 시간 우리가 정성스럽게 키워온 악순환도 있다. 미디어, 정보, 건강, 사랑 등 영역은 셀 수 없고 각 악순환은 서로 세포조직처럼 연합하고 기생하며 영향력을 키운다. 우리는 일과 삶 전체를 통해 기여한다. 적극적으로, 소극적으로, 소비를 매개로, 침묵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포기하며 참여한다.

지금은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날마다 생산한 데이터로 무한히 연결된 네트워크 시대다(3). 내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기록되고, 사소한 흔적도 정보로 쓰이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결과가 된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된 이곳에서는 소문은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퍼진다. 그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각자의 행동은 반드시 결과에 기여하게 되어 있다. 각자의 공간에서 개인의 시간을 살고 있는 지금, 생명체의 조직처럼 우리는 서로의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우리가 주인공이다

나눌수록 작아지는 속성을 지닌 모든 물리적 가치는 개별적 이익을 가장 존중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모든 의사결정의 우선순위로 정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돈과 같은 물리적 가치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내 노동과 수고, 시간을 쓰는 것도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같은 범주에 있다. 이익이 목적이 아니어도, 나만 손해를 볼 수는 없다는 논리가 어차피 같은 결과를 만든다. 모든 의사결정이 이익과 손해 양자 간의 선택이라면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안간힘을 써야 한다. 정답은 자명하다.

더워도 추워도 불편해도 참으라는 캠페인은 죄책감은 모르지만 효과는 별로 없다. 가만있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작은 행동도 한다. 환경을 생각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힙한 마케팅이 이런 자족을 돕는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원리나 솔루션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에 대해서는 오가닉 에너지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수고도 자처해야 하지만, 그런 지식은 돈을 목적으로 생산된 얕고 분절된 가짜 정보에 가려져 습득 자체가 어렵기 마련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악순환에 한 스푼씩 무게를 더하고 그 대가는 나중에 치르게 될지언정 오늘은 어쩔 수 없다는 결정에 이른다(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외부효과(externality)’라고 정의한다).

전기차 시장의 과도기는 이런 시나리오로 쓰여 있다. 내연기관차를 계속 타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건강이나 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 알게 되었지만 내 차를 전기차로 바꾸는 결정은 쉽지 않다. 충전은 불편하지 않은지, 불이 난다는데 위험하지는 않은지, 꼭 내가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일 필요가 있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나 혼자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악순환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던 내가 어느새 주인공으로 등극해 있다.

왜곡된 진실이 혈액의 공급이다

문제의 핵심은 악순환의 주인공이 ‘나’라는 자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왜곡된 진실은 이런 악순환이 계속 자라서 성장할 수 있도록 공급되는 혈액이다. 코로나처럼 통제된 생각이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습관적 실천이든, 깨닫지 못하고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의도된 정보가 흘러 시대의 ‘진실’을 생산한다.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악순환에서 가장 큰 이익을 가져가는 이해당사자들(기업, 정치권, 미디어, 학계)의 서로 돕는 지배종속(먹이사슬) 구조를 기반으로 제 역할이 부여된다.

돈을 목적으로 기업은 정부, 학계, 미디어의 신뢰도를 돈으로 사고 정부와 학계는 왜곡된 정보가 유통되는 정보원 역할을 수행한다. 미디어는 왜곡된 정보를 생산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증폭시키며 악순환이 살아서 성장할 수 있도록 혈액을 공급하는 데에 기여한다. 돈($: Money)과 신뢰도(C: Credibility), 정보(I: Information)가 악순환의 자원이다. 환경호르몬, 코로나백신, 전기차 등도 이와 같은 악순환에 갇혀있다.

위 스키마는 악순환에 참여하는 주체들 간의 역학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시대를 움직이는 대부분의 악순환들이 같은 메커니즘으로 동작한다.

전기차로 모두가 전환되는 시점이 빨리 오면 올수록 불리한 주체가 있고 이들을 돕기 위해 가짜뉴스 생산까지 마다하지 않는 미디어의 관계가 있다.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기업의 홍보팀과 법무팀 되기를 자처한다. 언론이 기존의 틀에 갇혀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해도 광고는 들어온다. 몰라서 썼든, 오해하도록 만든 후 아무도 안 볼 때 수정을 하든, 백 년 가까이 미디어의 가장 큰 고객이 되어온 광고주와 미디어의 서로 돕는 관계의 근원에는 돈이 있다.

미디어는 먹이사슬에 혈액을 공급하는 조력자만은 아니다. 그 자체로 선순환과 악순환의 법을 따르는 결과물이다. (10년 전 출간했던 오가닉미디어에서 주요 사례였던) 페이스북은 살아있는 미디어로 오랜 기간 인식되어 왔지만 그사이 네트워크는 연로해졌다. 더 많은 관심, 더 큰 영향력을 위해 글을 쓰고 지금 당장 뜨거운 것에 집중하는 사용자들의 순발력은 클릭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전통 언론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나중에 진실이 아니라고 드러나더라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참여자들은 상부상조하며 관심을 ‘좋아요’로 샀지만 이 과정에서 생산된 정보는 악순환의 혈액원으로 쓰이고, 네트워크 스스로도 생명체의 원리를 따라 쇠퇴로 간다.

그럼에도 나의 습관은 이런 유형의 서비스와 미디어들이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진실을 가려내는 것이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 지는 오래여도 나 스스로 습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통 매체의 기사를 일단 믿고 공유하면서 책임은 매체라고 이름표가 붙어있는 지면에 전가한다. 바빠서, 훈련받지 못해서, 시행착오가 부족해서, 우리 스스로 수동적 참여자의 역할을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다. 악순환의 가속도가 만드는 힘은 내 관성으로 더 강해진다.

우리의 관성이 수명을 연장한다

악순환에 공급되는 혈액은 악순환의 수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악순환과 선순환의 운명을 신뢰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신뢰란 겉과 속이 같을 때 돌려받는 보상이다. 신뢰는 받는 사람, 주는 사람, 쌓이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을 두고 정보의 축적을 통해 신뢰관계가 자라고 세상은 이 관계를 통해 움직인다. 악순환의 균열은 겉과 속이 다른 사실이 밝혀지고 신뢰에 균열이 갈 때 일어난다. 반대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 악순환은 계속될 수 있는 힘을 낸다. 무엇이든 지속가능한 힘의 원천이 신뢰에 있다. 반대로 왜곡에 대한 자각은 악순환의 소멸을 돕는다. 예컨대 전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던 ‘코로나 팬데믹’도 정의의 상징이던 미국 정부, 객관성의 상징이던 전통 미디어, 명망 있는 제약회사, 명망 있는 기업가, 명망 있는 학자들에 대한 오래된 믿음을 자원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2024년 3월 이를 둘러싼 여러 의구심, 논쟁이 기어이 촉발하는 기어이 촉발하는 단계에 있다.

자각이 일어나도 소멸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환경, 기후, 에너지, 전쟁, 자연, 생태계처럼 수백 년 누적된 악순환의 악순환도 있다. 게다가 우리 스스로가 악순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경우는 문제를 인지한 다음에도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신뢰를 주고받을 대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두 이대로 가던 길을 가야 한다. 악순환이 충분히 돌아갈 수 있도록 성실하게 시간을 벌어준다. 왜곡된 정보를 수혈하는 우리의 수동적 참여는 정당하게 인식된다. 그 참여가 옳다고 적절한 보상까지 제공된다.

겉과 속이 달라서 어차피 무너질 신뢰라고 하더라도 그 수명이 길어지면 성공과 다름없다. 악순환의 결과는 (관계의) 파괴를 초래하게 되어 있지만 그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성패를 가를 것이다. 악순환의 수명을 최대한 늦추고자 하는 힘과 이를 최대한 빠르게 소멸시키고자 하는 힘 중에 나의 무게는 어디에 있는가. 작고 나약한 우리에게 소멸의 시간을 앞당길 힘이 있는가. 그런데 악순환은 적이 아니다. 내 안에 있다.

참과 거짓의 구분은 흑과 백처럼 명료하지 않다. ‘의도(intention)’에 의해 정해진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생산하거나 전달하다 보면 악순환의 생애주기에 참여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참인지는 자신이 알고 있다. 진실을 판단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레퍼런스를 통한 나의 이해다. 내가 주인이다. 조금 부풀려지고 조금 타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에서 멀어지고 악순환에 저절로 합류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근거 없이 장담을 먼저 하는 것도, 의도가 아니라고 억울해도, 결과는 거짓이 된다(나의 경험담이다). 악순환의 먹이사슬에 동참하고 결국 그 악순환에 기여한 역할을 통해 나 자신도 신뢰를 잃는다. 신뢰를 잃으면 관계가 끊어지는 결과를 맞는다.

우리의 고갈이 아킬레스건이다

거대한 인류의 악순환에 놓인 우리는 모든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성적표를 받았다. 자연만이 아니다. 각자의 삶 안에 고인 물이 되었다. 악순환의 증표는 전쟁으로, 분열로, 소외로, 질병으로 수없이 드러나고 있다. 모든 생명과 공존할 수 있는 힘의 부재, 그로 인한 존재의 파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열심히 사는데 오히려 뒤로 가며 성장에 목마른 사람들, SNS로, 데이터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데 등을 돌린 사람들, 나의 모습이다. 공존을 위한 생태계의 법칙이 파괴된 채 그 파편의 조각을 잡고 각자 생존의 방법을 찾고 있다.

풍요의 시대에, 물질적 가치를 풍족하게 나누게 된 때에, 왜 우리는 관계의 파괴와 생명의 고갈 앞에 서게 되었을까? 돈의 원리를 따라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 풍요는 반드시 악순환을 만들고 반드시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지는가? 존재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연결은 ‘살아있음’이 가진 본성,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적 가치를 만들고 나누는 경험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고갈되는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여기서 드러난다.

물질적 가치로만 작동하는 악순환에는 존재적 가치를 만드는 힘이 없다. 이것이 모든 관계를 파괴시키는 비극을 초래한다. 왜곡된 정보, 의도된 정보를 아무리 공급해도 고갈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곧 선순환을 만드는 원리의 발견이다. 돈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가 지속되면 될수록 존재(적 가치)는 희생되고 고갈된다. 반대로, 악순환을 무력화시키고 참여자들을 선순환의 네트워크로 흡수할 수 있는 힘을 반작용으로 발생시킨다.

존재적 가치란 내가 아닌, 세상(대상)을 향한 ‘왜’가 만드는 가치,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나, 치유되는 나를 만든다. 나눌수록 커진다. 돈이나 권력처럼 나눌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기쁨, 만남(관계맺기)처럼 나눌수록 커지는 가치를 말한다. “알게 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 같은 것들이다(4). 내가 누리는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의 전염이다. 내가 누구인줄 알기에,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길을 아는 사람들이 발견한 삶의 비밀이다. 서로가 고갈되지 않도록 공급하는 샘물이다. 자신을 앎으로, 모든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샘물이다. 스스로 다른 생명을 위해 기꺼이 그 샘물이 되어주는 능력이다. 그래서 여러 줄기가 만나고 합쳐지고 갈라지는 연결을 통해,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바다가 되는 과정이 곧 삶이라는 것을 체득하는 것이다. 진실의 왜곡을 통해 살아서 성장하는 악순환에 이 가치가 없다.

악순환의 균열

출구가 여기 있다. 망가진 세상의 실체 앞에 선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로소 멈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어렵게 인지한 악순환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나 하나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얼마나 무모한 사람들의 바보같은 짓이며, 스스로 벗어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조직화를 꿈꾸겠는가. 새로 시작하고 싶어도 움직이는 가속도 안에서 멈추기는 쉽지 않다.

그럼 이 시대의 돈키호테는 누구이며 어떤 메시아를 기다릴 것인가? 시대는 사람을 낳는다. 그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를 기록한 서사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창조의 시간, 전쟁의 시간, 종교의 시간, 정복의 시간, 발명의 시간, 혁명의 시간의 중심에 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연결이 지배하는 이 시대가 낳은 그 사람은 바로 우리, ‘한 사람’이다. 나처럼 나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한 사람, 오직 단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꾸고 기록할 힘을 가졌다. 모두가 하나의 몸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세상은 어디에도 센터가 없다. 흩어져 있으나 조직화할 수 있는 힘이 여기 있다. 운명 공동체의 세상에서 나의 힘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악순환의 균열은 나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된다.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때 지구의 먼지보다 작은 내 존재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낸다. 기술의 관점이든, 생태계의 관점이든, 존재의 관점이든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결정적인 구간을 지나고 있다. 여기서 모든 크고 작은 문제의 해결 과정은, 저마다의 ‘왜’를 실현하는 과정은, 강물처럼 서로를 만나, 서로를 깨우고 서로의 의식이 확장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만든다. 살아있는 미디어로 조직화된다.

정보란 운명 공동체를 결정하는 몸의 피와도 같다.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악순환에 갇혀 있을 때 치유는 어디서 오는가. 답은 존재적 가치를 향한 각자의 ‘왜’에 있다. 지금부터 여러분 안에서 자고 있는 ‘왜’를 찾는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 있는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 각자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거기, 지도가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길을 잃지 않고 서로의 나침반이 되어줄 ‘왜’를 만나러 가자. 선순환을 만드는 비밀이 이 책에 있지 않고 여러분의 발견에 있다. 진실된 나를 발견하는 모멘텀에 있다.

  • (1)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Jean Ziegler,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ée à mon fils, 1999), 유영미 역, 갈라파고스, 2007.
  • (2) 윤지영, 시간과 공간 관점에서 본 미디어의 역사, in 오가닉미디어, 오가닉미디어랩, 개정판 2016(초판 2014), p. 193.
  • (3) ibid, 연결이 지배하는 미디어 세상의 미래, pp. 327-336.
  • (4) 2024년 1월 5일 진행된 ‘Why 워크숍’에서 조아영님이 찾아낸 문제의 일부를 인용했다. “알게 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조아영”

<이어지는 글: [WHY] ‘왜’를 찾아서 1편: 9시간의 사투>

Mar 11, 2024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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