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직업의 종말 (End of Jobs)

[Why] 직업의 종말 (End of Jobs)

<이전 글: [Why] 돈의 작용 반작용 (Action and Reaction of Money)>

“고모는 직업이 뭐야?” 아직까지 답을 하지 못했다. 직업으로 명명한다면, 컨설턴트, 기획자, 대기업 임원, 스타트업 대표, 강사, 저자(작가), 액셀러레이터, 회사원 등 지금까지 지나온 많은 이름표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답을 해버린다면 거짓말이다. 직업 카탈로그의 그 어떤 것도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수많은 실패와 만남과 배움과 산을 넘는 경험의 여정에서 나는 아직도 성장 중에 있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각자의 성장의 기록이 직업의 정의를 대신하게 되리라 믿는다.

이 글은 답을 대신해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다. “요즘 의대가려고 ‘SKY’에 가고도 자퇴를 한다”라며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전하는 사랑의 고백이다.

왜 직업인가?

이전 세대는 평생직장을 위해 삶을 바쳤고 지금 세대는 매일 저녁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를 하고 직장 밖에서 삶을 찾는다. 지금은 개인에게도, 조직에게도 혼돈의 시기다. 패러다임의 중첩과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개인은 일을 통해 성장하고 싶지만 삶의 질이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조직 밖의 삶이 더 중요한 개인은 도망가기 바쁘고, 회사는 열정페이 대신 이들을 붙잡을 새로운 조직문화를 찾느라 바쁘다. 이런 와중에 챗 GPT 같은 AI까지 가세해서 우리의 경쟁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직업은 사회적 산물이다. 그 종말은 AI가 가져올 것이 아니다. 직업의 종말은 이미 와있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한 개인의 삶도,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사회도 결정된다. 성장과 파괴, 풍요와 결핍이 공존하는 지금은, 극단적인 비등의 구간을 지나고 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는 시기를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직업은 이 현실에 대한 증거이자, 이 드라마를 이끌어온 미디어다. 그래서 직업의 종말은 새로운 출구를 갖고 있다.

지금부터 직업이 사회적 종말에 이른 여정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직업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통해, 질문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 글은 온 삶에 걸쳐 우리를 일터로 이끌어온 나침반을 향해 던지는 문제의 제기다. 무엇이 될 것인가, 꿈을 꾸기 시작한 때부터 직업의 숙달된 수행까지, 초등학교부터 정년퇴직까지 최소 50년, 앞으로는 수명도 길어졌으니 60년, 70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직업을 만나고 어떻게 성장했으며(할 것이며) 그 결과 무엇이 되었는지 (될 것인지)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진다. 직업을 우리 존재로부터 분리해 내는 시도를 통해, 우리 각자가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에 다시 서고자 한다.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한 번뿐인 삶에서 가장 신중한 선택이었다. 나는 법대를 나온 엄마의 영향으로 한동안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공부를 많이 해야 해서 일찍 포기했다(그러고 나서 더 많이 더 오래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매년 장래 희망을 써내거나 답을 해야 할 때 늘 막막했다. 아는 직업이 별로 없었다. 나 같은 아이들은 대부분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요즘은 유투버나 연예인이 인기라고 한다. 세상을 혁신하는 창업가도 적잖게 롤 모델이 되었지만, 반대로 이런 세상에서 의대처럼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을 가장 오래 보장해 준다는 학과와 직업이 인기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시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때에 따라 멋짐의 정의는 다르지만 누구나 꿈을 꾸는 시기를 지나, 현실에 맞춰 직업을 선택하고 삶의 진로도 일찌감치 결정된다. 평생직장 개념은 이제 없어져서 이직도 잦고 직업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이 더 중요해졌다지만 직업은 개인에게 여전히 경제적 토대와 사회적 실현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다.

선택의 순간부터 직업은 내 정체성이 되었다. 처음 갖게 된 명함이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 시작한다. 그 명함으로 나를 소개하고 사회생활의 이름표로 쓴다. 초보라면 그 정의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경력직이라면 더 전문가, 더 좋은 직급이나 더 안정적인 조직으로 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든 재택으로 접속을 하든, 매일의 출퇴근을 반복하는 시간을 지나 직업과 내가 궁극에 하나가 되는 것이 삶의 여정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이 되었는가? 나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나는 끝내 무엇이 될 것인가? 단 한 번 나에게 주어졌던 삶을 불꽃처럼 마감하기 전에.

직업 시장의 굴레에 갇히다

시장에는 상품이 있다. 상품을 파는 사람과, 상품을 사는 사람의 거래를 통해 동작한다. 돈과 교환될만한 가치가 있는 물품들이 진열되면, 가격은 거래를 통해 결정된다. 너무 높게 책정하면 팔리지 않고, 너무 낮으면 장사를 하러 나올 이유가 없다. 거래를 통해 그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장의 원리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곳, 여기는 직업(노동)시장이다.

상품이 된 우리

시장의 상품 카탈로그에서 직업을 선택하면 우리도 드디어 판매 대상이 되고 가격이 매겨진다. 직업은 계속 세분화되어 현재 한국 직업사전에 기록된 종류는 16,000개가 넘는다지만 직업을 골라야 하는 시기에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직업의 수는 많지 않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지금은 적성이나 능력보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가, 얼마나 계속 월급을 받을 수 있는가가 흔한 선택의 기준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먼저 고용될 자격을 갖추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최소한 20년이 필요하다. 대학에 가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외국어 능력도, 각종 자격증도 필요하다. 시장에서 선택받고자 하는 잠재 상품은 많다. 대학 입시 학원, 자격증 학원 등 직업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시간에 쫓긴다. 초등학생처럼 어린 나이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 과정을 거쳐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상품으로서의 정체성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고용주가 누구든 선택될 수 있는 자격, 더 선택하고 싶은 상품이 되도록 노력하는 과정 안에 있다. 고용주의 입장이라도 본인에게 선택되어야 할 상품이 있다면, 좋은 인재를 고용하기 위해 조직문화와 보상체계에 힘쓰고 있다면, 시장의 원리에 이미 참여 중이다.

평준화의 비극으로부터

평가의 기준은 생산성이다. 사회가 합의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이기 때문이다. 생존 과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류의 본능, 과학의 발전과 산업화, 대량생산과 노동분업, 경쟁을 통한 경제 번영의 결과를 향해 달려온 역사가 증언한다. 생산성에 따라 우리에게 가격이 설정된다. 고용된 주체는 인격이 아닌, 생산의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적정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을 때만 경제적 보상, 사회적 보상(승진 등 사회적 계급으로 보상) 등으로 지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원리가 그렇다.

다만 각 개인이 가진 저마다 다른 능력과 인격성은 정량적으로 환산되기 매우 어려운 성질을 갖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가의 기준은 세월을 두고 더욱더 정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인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동등한 기준으로 가격을 설정하려면 정량화하고 계량해야 한다. 가치는 더욱 더 객관화될 수밖에 없다. 공정하려면 표준도 필요하다. 다면평가, 상대평가, KPI, 개발자라면 소프트웨어산업 진흥법에 따른 기술등급, 건축사라면 공사비에 따른 설계비 요율, 강사라면 박사학위 연차와 강의 연차에 따른 강사료 등 이루 열거할 수도 없는 기준, 표준, 법령 등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분쟁을 없애기 위한 거래 기준이 적용되면 될수록 개인의 가치는 가장 낮은 곳으로 수렴되는 결과에 이른다. (‘돈의 등가성‘은 이미 앞선 글에서 정리했다.)

이 모든 과정은 직업을 무력화시킨다. 익숙하고 반복적인 업무 수행의 합을 통해 직업과 하나 된 내가, 새로 출현하는 현상과 환경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직업 ‘전문가’의 탄생

“(…)그곳에서는 일반적으로 물격적이고 객관적인 문화가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문화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광범위한 노동분업과 전문화가 관찰된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을 단순히 실제적인 기능과 과업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는데, 그 결과 모든 개인의 주관적 인격이 평준화되고, 따라서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갖지 못하게 된다.”(1)

평준화의 비극은 모든 직업의 기능화를 낳는다. 무슨 일이든 시간을 두고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그 일에 능숙한 달인이 되는데, 우리가 목격 중인 직업의 행태가 바로 이것이다. 사회가 합의한 보상 방식에 맞춰 ‘전문가’가 된다. 덕택에 만들어진 것이 파워포인트 전문가, 엑셀 전문가, 정부지원사업 전문가, 의사라면 시술 전문가(해외에서도 관광코스로 찾아오는 대한민국의 성형 수술), 치과 의사라면 임플란트 식립 전문가(오늘까지 몇 개의 임플란트를 심었는지가 치과의 마케팅), 교수라면 정년보장을 위해 SCI 등재지 규격의 논문을 생산하는 전문가다. 요즘은 눈먼 돈의 흐름 따라 빅데이터 전문가, AI 전문가 등으로 쉽게 옮겨다닐 수 있는 능력, ‘남들보다 빨라서 전문가’도 적지 않다. 여기서 직업은 온전히 돈을 버는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은 어떤 전문가가 되었는가? 우리는 직업의 달인이 되었다. 개인의 인격과 가치가 배제된 직업의 능숙한 수행의 결과다. 우리는 서로를 훈련된 상품, 능숙한 기술자로 전락시키고 스스로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배울 것이 넘쳐나고 예측이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는 불안하다. 일을 해도 성장이 없기 때문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해서 안전지대에 있지 않다. 관리자가 힘들게 배워야 하는 것들을 인턴사원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침반이 없기는 신입사원도 마찬가지다. 직업 숙련공이 된 내 자리는 AI가 무한히 대신해 줄 수 있다. 지치지도, 잠을 자지도, 보상을 해줄 필요도 없지만 무한히 발전하는 경쟁자다.

직업의 틀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 개인의 인격과 능력은 AI와 평준화되는 운명에 이른다. 시장의 논리에서 직업은 나를 가둔 우물이다. 정의된 역할 밖으로 벗어나기 어렵다. 대신 우물 안에서 열심히 반복하고 수련하며 평준화의 비극에 동참한다. 현상은 태도로 표출된다. 직업의 굴레 안에서 차곡차곡 뒤덮이는 일에 대한 나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태도, 사람에 대한 태도, 세상에 대한 태도가 된다. 곧 세상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된다.

질식된 영혼

“직업은 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개인에게 객관적이고 외적으로 주어진 기능과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켜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점차로 증가하는 직업적 분화와 전문화는 개인적 인격의 무차별화를 점점 더 강하게 요구한다. 직업세계에서 “특정한 기능이나 지위의 담지자”에 지나지 않는 개인의 인격은 마치 “호텔방 고객의 인격과 같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더 높은 연봉, 더 높은 지위, 더 높은 영향력이 개인의 성장이라고 단정해왔다. 이런 것이 고귀한 보상이고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서로를 부추겨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보상으로 받고 우리는 메마른 상태, 결핍에 이르렀다. 우리는 영혼을 내어주고, 관계를 버리고, 돈을 받고, 권력을 받고, 계급을 받았다. 우리는 성장한 것인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가 아닌가 반문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복받은 삶이다. 나도 그런 회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비전으로 시작한 조직도 살아남아 목표점에 도달하려면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그래야 존속할 수 있다. 돈으로 환산되는 것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자본주의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족은 그래서 양날의 검이다. 이름표 없는 노동의 착취는 명분화되기 쉽다. 우리가 서있는 토양이 자본의 질서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만드는 시스템 안에서 깨어있는 의식이란 나에게도 회사에게도 쉽지 않다.(3) *노동 착취의 반대 현상으로 ‘고용 착취’도 같은 원리 안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출구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룬다.

인류는 물질적 결핍에 맞서 산업화를 이뤄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여기에 지분이 있다. 물리적 생존이 과제이던 구간을 지나 풍요의 시대를 맞았다. 그리고 새로운 생존의 숙제 앞에 서 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입에 넣고, 몸에 두르는 풍요를 만들어 내는 동안 질문하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질식된 영혼은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존재적 빈곤의 원인은 시스템이나 외부 환경이 아니라, 참여자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온 나로부터 온다.

바쁜 것이 능력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계속 생산 중이다. 대신 심신이 고갈된 피로 상태에 놓여있다. 질문하는 능력, 들을 수 있는 능력, 발견하는 능력, 사랑하는 능력이 오늘 내 삶 속에 있지 않다. 나 스스로 언제나 부족한 상태인데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누구를 도울 것인가. 이것은 종교인이나 위선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도 우리처럼 능숙한 직업 전문가로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직업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때, 나 스스로도 타인의 돈벌이 수단을 위한 도구 외에 아무도 아니다.

이 과정에서 여기는 위로가 필요한 사회, 낙오될까 봐 불안한 사회, 좌절하지 말라는 책이 넘쳐나는 사회, 퇴근이 퇴사가 되는 사회, 좋아요 숫자가 존재를 대신하는 사회, 돈과 권력과 명예가 직업 정신을 지배하는 불신의 사회가 되었다.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누구인지 사고하고 뿌리째 질문할 수 있도록 돕던 학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질문하지 않는 시대, 안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의 부재, 존재적 빈곤에 처한 시대, 우리 모두가 증인이다.

직업이 만든 실체

취업 전부터 시작된 직업의 굴레는 은퇴를 해도 계속된다. 은퇴와 함께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더 많은 사회적 성취, 돈, 명예, 권력이 성장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은퇴와 함께 사라져서 힘들다. 직업의 무게가 지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평생 세상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는 여전히 시장의 논리 안에 갇혀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무리 쌓여도 성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장이란 생명의 자람을 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사회의 평가는 내 존재 안에 있지 않다. ‘나’가 아니다. 은퇴가 힘든 이유는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성장하지 못하고 시간을 다 써버린 자신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매개체인 직업은 우리 자신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직업은 내 삶의 증인이자, 내가 끝내 도달하지 못할 정체성이며, 벗어나고 싶은 삶의 굴레다.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 직업은 나 자신을 돈의 수단이자 도구가 되게 만들고 대신 스스로 인격화되었다. 직업에 대한 나의 태도가 거꾸로 나를 만들고, 나와 직업의 지배관계도 결정한다. 내가 수단으로 선택한 직업, 내가 도달하고 싶은 직업, 나를 돈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직업, 내가 벗어나고 싶은 직업과 나의 관계는 곧 사회(의 형태)다. 그런 직업의 실행들이 모여 지금의 사회가 되었다. 거래관계, 경쟁관계, 갑을관계, 지배관계는 인격은 없고 도구가 도구를 만드는 과정의 증거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삶의 여정은 한 시대를 지배해온 직업의 운명에 이른다. 노동의 분업체계와 시장의 원리가 만든 직업의 유통기한이 끝나고, 여기 인격과 영혼이 말살된 채 우리가 남겨져 있다. 지금 삶의 질, 워라밸을 찾는 트렌드는 말살된 개인성,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자 생존을 위한 외침이다. 다만 평생의 절반을 개인이 탈출해야 하는 묵과된 시간으로 직장에서 보낸다면 이것보다 불행한 현실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시적인 방편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회피를 통한 분리가 아니라, 직업에 대한 자각을 통한 분리, 존재적 질문이 필요하다.

직업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

성장하기를 멈춘 생명은 소멸하게 되어있다. 여기서 성장은 직업적 기술이나 유용한 지식과 정보가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풍요의 시대까지 왔다. 직업의 굴레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서로를 고갈시켜왔다는 자각이 직업에게 종말을 명한다. 그 끝을 알리는 새로운 파도가 이미 와있다. 내 자유와 영혼이 박탈된 곳으로 인공지능이, 직업의 능력 만렙을 장착한 새로운 노동력이 함께 살자며 밀고 들어온다.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성장하는 로봇이든 파괴된 생태계든 우리가 만든 쓰레기든) 시대가 이미 도래한 것이다.

직업은 이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노동 분업 체계와 직업 시장, 물질적 풍요는 구조적으로 하나다. 직업은 분명히 풍요의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지만 풍요가 가치가 되던 시대가 이제 가고 없다. 풍요를 향해 달려온 관성이 남아있을 뿐이다. 물질적 과잉에 도달한 이후에도 여전히 풍요가 목적이 되는 이 사회는 성장을 멈춘 사회다. 여기서 직업을 다시 바라보아야 직업의 종말을 인정할 수 있고, 그래야 출구가 될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직업의 종말은 물질적 풍요의 무덤 위에 있다. 질문은 직업의 굴레 밖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직업에 갇혀 있는 동안 퇴화된 우리의 능력은 무엇인가?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인간의 지식으로 따라갈 수 없게 될 AI가 지배하든, 생산과 소비의 탐욕 속에서 먹고 마시는 물적 자유에 자족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이 글이 참 미안하다. 아니라면 이제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시작하자. 다음 파도의 방향은 우리 질문이 결정할 것이다. 직업의 굴레 밖에서, 직업의 무덤 위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올 질문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 책은 질문을 도움으로써 궁극에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돕는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질문에서 출발하는 다음 글은 새로운 결핍의 시대에 가치란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원리를 함께 알아볼 것이다. 그 주체로서, 미디어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드러나는 줄거리의 시작이다. 여러분의 본질적인 질문이 이미 답을 갖고 있다.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가 오직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 (1) 김덕영, 게오르그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도서출판 길. (p. 168) *대도시와 노동 분업화가 시작된 시기, 100년 전에 쓰여진 짐멜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 (2) Ibid. (p. 116)
  • (3) 글을 공개하기 전에 여러 독자의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는 단계를 여러번 거친다. 특히 이 단락은 김은지님의 피드백으로 추가하게 되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X (Twitter): @agnesyun
Linkedin: agnesyun

2 thoughts on “[Why] 직업의 종말 (End of Jobs)

  1. 개인의 가치가 투영된 삶이라는 목표에 있어 각자가 그린 성공이라는 결과론 적인 다차원의 함수에서 x, y, z 등 변수들을 규정하는 것이 직업(업)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상기시키는 글입니다. 시간의 선상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든, 공간의 개념에서 여러 분야에 걸처 있던, 삶의 목표와 가치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직업(업)은 하나의 방향으로 개인이 그 궁극에 도달할 것인가를 끊임 없이 묻고, 답하고, 실험하고, 실행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는 선순환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입니다.

    • 너무나 와닿는 귀한 피드백이에요 🙂 맞습니다. 직업 자체가 목표가 된다면 직업에 갇힐 수밖에 없고, 직업 밖에서 가치를 만들려고 해도 결국은 직업의 틀이 장벽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직업의 개념을 해체하고 (이 개념 자체가 이전 시대의 산물이므로)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를 만드는 원리 안에서 개인의 삶도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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