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에서 붓을 들고 몰두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스타트업 대표를 보며 한 멤버가 묻는다.
“성영님, 언제부터 그림 그리셨어요?”
“토종꿀 프로젝트가 처음이에요.”
“아니, 디자이너로 일한 지 20년 넘지 않으셨어요?”
“그동안은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때도 즐겁게 작업을 했고 원하는 것을 그렸지만, 지금 온 마음과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요. 이 토종벌이, 저에게는 첫 그림입니다.”

우리가 연천의 밀원지를 처음 다녀온 것은 2020년 6월이다. 모두가 반대했던 프로젝트였다. 서울대 푸드비즈랩에서 토종벌을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토종꿀 상품화에 ‘프롬‘의 참여를 제안했다. 당시 함께 협업하고 있던 경기대 꿀벌질병연구소 팀은 토종벌의 DNA 검사부터 시작해서 날개짓으로 꾸덕하게 만든 토종꿀인지 인위적으로 가열한 꿀인지 판별하는 등 정밀성분검사 키트를 개발한 상태였다. 그전까지는 토종꿀인지 확인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알음알음 지인의 말을 믿고 사는 정도였다. 게다가 국내에서 누가 어디서 토종벌로 한봉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데이터도 구축되지 않았었고 그러니 토종꿀 시장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멸종 위기의 토종벌을 살리는 것은 다양성을 보존하고 지구의 생태계를 살리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믿을만한 팀들과 토종꿀을 상품화하는 과정은 말만 들어도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계산기를 두드리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 꿀의 양은 너무나 희소하고 게다가 토종꿀의 가치가 소비자들에게 알려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나 매달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는 작은 스타트업이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우리를 아끼는 많은 분들이 다 반대를 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모든 결정은 밀원지를 처음 방문한 그날 이뤄졌다. 아니, 결정이라기 보다 여기서부터는 토종벌과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이야기다. 이 한사람의 이야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과정에 관한 것이다. 작은 하나에서 시작해서, 연결을 만들고, 그 네트워크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체득의 과정 자체가 곧 마케팅임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오가닉(살아있는) 마케팅’의 교과서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옆에서 지켜본 멤버들이 함께 감동하고 전염되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강력한 Why: 왜 이 일을 하는가

비무장지대가 시작되는 지역의 넓은 들판과 산기슭, 지천에 흐드러진 초록은 평화로웠다. 거기서 토종벌을 만나고 자연 곳곳에 숨겨놓은 벌통을 지키는 생산자들의 한결같은 웃음을 만났다. 토종벌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곳의 들꽃, 나무, 산들거리는 바람과 자연의 호흡을 날갯짓에 담아 첫서리가 내리는 11월, 꿀을 딱 한 번 뜰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한 지역에서도 벌집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주변 꽃들과 들풀, 나무, 환경 즉 ‘떼루아’가 다르니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른 맛과 향을 지닌 것이 토종꿀이다. 그래서 멈춰진 시간과 공간이 벌집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 옆에 꿀벌들 만큼이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웃게 만드는 것일까. 이 한 사람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꿀벌들은 그 비밀을 오직 이 한사람에게만 알려주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우리는 그 얘기를 듣게 된다.
꿀벌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행복한 공동체의 원리였다. “꿀벌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오늘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각자의 삶이 공동체에 이로움이 되잖아요. 꿀벌은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해내고 서로를 느끼며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이런 삶이 행복하고 좋다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가 좋은 것이라고 몸짓으로 말을 해주고 있었어요.”
알듯 말듯 했다. ‘함께 살아간다’라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인간에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이 당연한 비밀이 당시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꿀벌들은 각자 개체로 존재하지만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하나의 군락을 이룬다. 각자 독립적이면서 또한 단일을 이루는 초개체다. 세상의 만물을 연결하고 생명 관계를 유지시키는 주체이자 원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먹는 것의 4분의 3이 꿀벌들의 도움없이는 만들수 없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그는 이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계산보다, 지켜주고 싶고 전하고 싶은 가치가 먼저였다. 이 시각 이후 지금까지 그는 토종벌 프로젝트에 온전히 몰입해 있다. 처음에는 팀의 멤버들 모두 깊게 생각하지 않거나 심지어 삐뚫어진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생존인 스타트업에서 정말 저렇게 고귀한 생각으로 ‘지켜주고 싶은 가치’에 몰입하며, ROI를 생각하지 않고 뛰어들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한 사람의 이 강력한 ‘왜 이 일을 하는가 (Why)’가 증명 되면 얘기는 달라지게 된다. 결국 공감하고 감동하고, 이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들을 팬으로 만든다. 더 큰 사이클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참여감을 만들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항해의 나침반이 된다. 다만 거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걸어가기
팀이 모두 각자의 과중한 업무로 바쁜 동안 그는 혼자 일했다. 밀원지를 다니고 생산자를 만나고 성분조사팀을 만나고 모든 신뢰의 과정을 동반하고 방산시장, 충무로, 을지로를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초반에 거의 없었다. 그래도 계속 생각을 기록했다.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토종벌의 삶과 함께 밀원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이유처럼 그곳의 삶을 함께 살아내는 농부의 모습과 그 모든 과정이 온전히 기록되고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전화통을 붙들고 연신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패키지 문제 때문이었다. 모든 성분 검사를 통과한 꿀을 소분도 했고 연천과 제천 각 생산자의 브랜드가 독립적으로 세워질 수 있는 디자인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문제는 택배로 발송할 때 2개의 꿀병이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귀한 선물포장까지 되려면 쓰레기 더미를 배송해야 할 판이었다. 귀한 토종꿀처럼 버릴 것 하나 없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을까. 해결책을 찾았다며 우리에게 프로토타입을 보여줬을 때 모두 깜짝 놀랐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깨질 위험이 없는, 심지어 완충 패키지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겹한겹 꿀벌들이 쌓은 벌집을 형상화한 모습이었는데 배송을 받은 후에는 책상위에 놓고 인테리어 소품으로 쓸 수 있는 스테이셔너리였다. 이렇게 문제를 집요하게 해결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밖의 고객들보다 팀이 먼저 팬이 되기 시작했다. ‘저게 되겠어? 이게 더 바쁘지 않나?’ 하던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매일이 쌓여 진심을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 방향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함께 걷는 길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기
인간은 목적지향적이다. 조직의 팀원이든, 구매자든, 파트너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쉽게 전락한다. 그래서 협업을 해도 서로를 바라볼 시간이 없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직원이든 파트너든 고객이든 누구든 함께 걷고 있는 동료를 바라보는 것,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 과정에 일을 하는 이유가 있다. 처음에는 느린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다.
2021년 1월, 진심을 담은 꿀 병 하나하나에 고유번호를 적고 정성을 다해 세상에 하나뿐인 상품을 한정판으로 제작했다. 준비한 수량은 순식간에 완판이 되었지만 고되고 어려운 작업은 더 남아있었다. 약속한 배송날짜에 전에 없던 폭설과 한파가 예상되었다. 날씨가 추워 배송 과정에서 꿀이 얼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모든 수고가 허사였다. 결국 서울지역만이라도 직접 전달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아마도 진심을 다한 그의 여정이 잘 마무리되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기꺼이 택배기사가 되어 구매하신 분들, 선물 받으시는 분들께 어떤 상품인지 직접 설명도 드리고 인사도 드리며 얼굴을 마주하는 감사한 시간이 기록되었다.

-윤성영
함께 키워온 토종벌의 마음이 100명의 사람을 찾아 만나진 날.
토종 꿀벌이 주인을 만난 날.
함께 그리고 싶은 그림이 많습니다.
꿀벌의 몸에 비친 우리의 풍경 그 위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무지개 징검다리를 걷고 있는 꿀벌의 모습.
한사람의 성장, 새로운 사이클의 시작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는 처음에는 머리로, 그다음에는 가슴으로, 그다음에는 몸으로 온다. 머리로만 이해했을 때는 이미 다 안 것 같다. 곧 실행이 될 것 같거나 이미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다. 가슴으로 이해했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온 다음이다. 제대로 실행이 되지는 않지만 이제는 과거의 관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몸으로 이해하는 경험이 되면 관점이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된다. 네트워크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은, 꿀벌이 군락과 생태계를 이루는 원리와도 같다. 관계를 맺고 연결을 만들고 상호작용하는 그 과정 자체가 어느새 목적이 된다. 관계는 손에 잡히는 실체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지극히 구체적인 매개체, 유일한 경험과 배움을 낳는다. 관계와 내가 분리되지 않음을 알게 되는 지점, 그 지점에 새로운 ‘나’가 있다.
토종벌 부흥 프로젝트는 그후 몇번의 실행사이클을 더하고 캠페인 ‘댄스위드비(Dance with bee)’ 을 거쳐 마침내 2022년 2월 (주)댄스위드비로 온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 한사람의 ‘Why’가 자라나 같은 길을 걷는 든든한 동료도 얻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강력하고 진실된 신념으로 일하는 파트너들을 만나고 후원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 결과 꿀벌과 생태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공부하고 행동하기 위한 ‘댄비학교‘가 시작되었다.
오가닉 마케팅은 살아있는 생명이 자라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장 노트이자 네트워크와 하나 되는 체득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여기 있고, 저기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트워크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다음은 멈추기가 어렵다. 단순히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결되고 깨닫고 나아가는 오늘이 쌓여 돌이킬 수 없는 내일의 나를 매일 만나게 된다. 이제는 팬으로서, 후원자로서 그가 일궈가는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그 길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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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5, 2021(Update: Oct. 2nd, 2022)
Dr. Agnès Yun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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