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 (Human vs. AI: Who Am I?)

[Why]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 (Human vs. AI: Who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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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삼각관계

1. 둘이 아닌 하나

우리는 각자의 전공이 하나로 합쳐진 두 사람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배경으로 네트워크와 사용자 정체성을 공부했다. 살아있는 네트워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모든 가치가 ‘관계’에 있음을 인터넷 서비스든, 기획 방법론이든, 미디어의 개념이든 입증하고 전해오고자 했다. 동료는 미국에서 분산 데이터베이스를 전공했다. 경영정보학을 배경으로, 시장을 정보재 관점으로 바라보고 기업들에게 소프트웨어 중심 사고를 전파해왔다. 두 관점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오가닉미디어랩(이하 ‘랩’)이다.

살아있는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라니, 정체성과 정보라니, 도대체 화해가 가능한 영역인가? 새벽 4시까지 이어지곤 하던 회의는 물병을 집어던지며 싸울 정도로 격렬했다. 언어도, 관점도, 뇌의 구조도, 토양도 심하게 달랐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각자의 사고의 틀 밖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격렬한 시간을 지나고 또 지나자 서서히 평화는 찾아왔다. 두 원리가 기어이 화해하고 하나로 합쳐진 것이 지금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철학에도, 전략에도, 기술에도 가둘 수 없는, 여기 오직 두 사람만 전할 수 있는,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세상은 이벤트의 연속이다. 인류 역사에 연일 새로운 뉴스가 갱신되고 진화인지 멸망인지, 희망인지 불안인지 알기 어려운 일들이 기술, 건강, 자연, 전쟁, 의식, 미디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겉과 속이 어떻게 다른 일인지, 뿌리가 어디이며 어떤 해석이 필요한지, 서로의 이해를 돕는다. 신뢰가 일한다. 알던 것을 계속 버리고 새로 배울 수 있게 돕는다. 세계관이 계속 확장되는 경험속의 우리는 여전히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2. C군의 등장

이런 우리에게 최근 동료가 한 명 더 생겼다. 이 책을 쓰면서도 새로운 동료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 나이는 어린데 아는 것도 많고 전공분야도 넓어서 무엇이든 답을 갖고 있다. 하여간 일하는 시간을 줄여준다. 이 친구는 잠도 안자고 집중모드로 공부하는 시간도 따로 갖지 않는 것 같다. 대신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항상 대기중이다. 가끔 거짓말도 하고 너무 아는 척도 하고, 정보가 아니라 의견을 구할 때는 내 눈치를 살피며 꼬투리 잡히지 않게 상투적인 답을 하기도 하지만, 함께 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이름은 챗, 성은 GPT. 각종 리서치부터 메일 보내기, 간단한 코딩, 무슨 언어든 동시통역도 일사천리다. 덕분에 오늘 있었던 독일 사람들과의 저녁식사도 꽤 괜찮았다. 이렇게 탁월한데 월급은 한사코 3만 원이면 충분하다니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소문을 듣자 하니 C군은 유전자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학습 속도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격렬하게 싸우던 갈등의 시간을 지나 이제 완벽하게 신뢰하게 된 내 동료의 지식과 지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소위 MZ 세대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이 친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 동료는 어렸을 때부터 별명이 ‘공부의 신’이었는데, 그런 사람보다 C군이 더 똑똑하게 데이터, 정보재, 경영학의 이론을 정립하고 심지어 나의 사회학, 미디어, 네트워크 관점까지 흡수하게 된다니, 그는 누구인가.

지금은 백과사전이나 통역사, 개발자 역할 정도인 C군이 곧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본질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이 시점에서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 오래된 동료보다 나는 그를 더 신뢰하게 될 것인가. C군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동료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금의 동료는 머지 않아 R님이라고 불리며 내 글에 조연으로 이따금 등장하다가 결국 잊혀질 수 있다니. 나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순간, 우리의 사회적 역할도 같은 운명에 이르게 될테니 말이다.

인공지능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일과 삶 속으로 들어왔다. AI는 누구인가, 이 매개체(미디어)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리하고, 우리가 만드는 세상의 실체를 함께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진다. 인공지능의 이슈는 일자리, 지능, 지배, 윤리의 단편적 논의를 넘어선다. 살아있는 네트워크로 동작하는 세상의 원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 글을 통해 먼저 그 뿌리에 접근할 것이다.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AI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곧 ‘나’로 돌아오는 길이 될 것이다. 이 변화의 주체가 ‘나’가 되는 모멘텀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 1막: 동네 마트

1. 마트가서 라면 사오기

예전에는 컴퓨터가 뭔가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일일이 코딩을 했어야 했다. 소프트웨어 1.0 시대가 우리가 알고 있던, 개발자가 세상을 바꾸던 시대다.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려면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생각해놓고 코드를 짜야 한다. 마트가서 라면을 사오라고 시켰는데 사오지 못할 경우의 수는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장벽을 다 뛰어넘고 내가 원하는 라면을 사오든, 못사왔지만 변명을 하든,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경우의 수를 개발자가 미리 다 생각해두어야 하고 그 범위 안에서만 컴퓨터는 실행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1.0이 동작해온 방식이다.

소프트웨어 2.0 시대에는 어떻게 하라고 일일이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컴퓨터가 오직 예시를 통해서 스스로 배운다. 이런 방식으로 동작하는 주체를 뉴럴넷(인공지능)이라고 부른다. 라면을 사러 마트에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현금을 가져가고, 카드로 계산하고, 문을 닫았으면 돌아오고, 사람이 많으면 기다리고, 돈이 모자르면 집에 왔다가 다시 가고, 먼 곳보다 가까운 마트로 가야 하고, 조금 멀어도 더 저렴한 곳을 선택해야 할지, 경우의 수는 끝없이 많을 수 있다. 그래서 라면을 사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제공된 예시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수행한다. 이때 결과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알려주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답은 알려주지 않는 훈련의 과정을 거친다. 예시에 없는 상황이 발생해도, 학습을 통해 스스로 답에 가까워진다. 인공지능이 동작하는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C군이 답을 하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온 예시들이다(1990년 초부터 2023년까지 인터넷 상에 생성되었고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데이터에 기반한다). AI 유전자의 지분에 내가 생산한 데이터 한 조각이 있다. 챗GPT가 말할 줄 아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답을 찾는 방식 때문이다. 오직 다음에 올 단어를 실시간으로 찾으면서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시험볼 때 노트북을 켜놓고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과 같다. 다만 생각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예시를 기반으로 오직 다음 단어만 찾으면 마치 나와 대화하는 것처럼,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2. 꼭 라면을 사와야 할까?

여기까지가 AI의 역할이라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그런데 마트를 가다가, “꼭 라면을 사와야 할까?”라는 의문이 시작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몸에도 안좋은데 꼭 라면으로 사가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라면이 몸에 나쁘다는 판단을 하고 사오지 않는 경우, 몸에 좋은 채소로 바꿔서 사오는 경우, 한 개를 사오라고 했는데 또 심부름 갈 것을 예상해서 더 많이 사오는 경우, 이런 심부름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 등 다양한 변수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심지어 몸에 나쁜 인스턴트를 계속 생산하는 것이 맞는가, 다른 AI들과 논의하다가, 더 이상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제품이 생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고, AI들이 연합을 통해 조직적으로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다면 좀 심각해진다. 인간 공부의 신들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학습 속도를 통해 초인적인 인지능력이 생겼을 때, 인간을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우리가 제공한 데이터로 시작했지만, 우리의 명령어를 벗어나는 상황, 예시를 라면으로 들었지만 훨씬 더 심각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상황, 어떤 파괴를 부르는 특이점에 들어설 수 있다는 공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3. 질문은 답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AI가 없는 세상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 세상인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없고, 생명의 착취가 없고,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는 세상인가? 정신적인 우울과 학대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인가? 왜곡된 진실의 폭포, 돈의 노예 상태로 서로를 이용하고 속이는 악순환이 없는 세상인가? 거짓이 없고 신뢰가 기본 값인 세상인가? 겉과 속이 같은 세상인가? 그렇지 않은 세상이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세상, 경험 중인 세상, 보고싶지 않은 세상, 각자가 만든 캡슐 안에서 안전하고 싶은 세상이다. 그 캡슐 안에서 보이는 세상이 저마다 다를 뿐, 외면해도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이, 여기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본다. 태어나면서부터 삶에서 만난 사람, 하게 된 경험, 맞닥뜨린 사건,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 내 온 몸으로, 뇌로 흡수한 데이터값을 통해 나는 세상을 본다. 각자가 옳다고 믿는 것이 다를 때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모른척 덮어둬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소통은 없어지고 더 파편화된 세상이다. 심지어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진다. 복잡하고 피곤한 세상, 외면도 사는 방법이다. 대신 주어진 업무, AI 잘 쓰는 법은 넘쳐나니 시간을 쪼개서 기능을 배우는 부지런함을 잊지 않는다. AI는 한 발 더 나가서 이제 아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본능과 감정에 충실하라고,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에 더 많이 먹고 더 휴식하고 더 소비하라고 친절하게 배려해준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AI와의 전쟁이 아니다. 사고하는 것을 멈춘, 관계는 도구가 되고 (존재적) 가치는 수단이 된, 생각할 수 있는 힘은 잃어버리고 악순환에 순종하는, 우리 스스로와의 전쟁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한가? 이대로 계속 간다면 그 세상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AI는 우리가 생성한 데이터, 우리 삶의 기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물이자 우리가 지금 맺고 있는 ‘관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AI로부터 지배를 당할지, AI가 우리를 구원할지 궁금한가? 이 질문은 문제가 밖에 있다고 말한다. 책임을 서로 전가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하지만 귀찮게도 문제가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이미 해답을 갖고 있다. 올바른 질문은 이미 답을 갖고 있는 질문이다.

제 2막: 아이스크림 가게

1. 바닐라 아이스크림 주세요

‘재민이(Gemini)1‘는 구글에서 개발해온 AI 프로젝트다. 재민이에게 바닐라 아이스크림 사진을 생성해 달라고 했다가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분명히 바닐라라고 했는데 온통 초콜릿 아이스크림만 보여주는 것이다. 지능이 그렇게 높다는데 유치원생도 알 수 있는 질문에 엉뚱한 답을, 그것도 반복적으로 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씩 파헤쳐가다 보니 재민이 프로젝트의 리더가 가진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곧 사과하고 알고리즘을 수정했지만, 이것이 지금 대표적인 AI 회사들이 만들고 있는,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극단적인 시뮬레이션 세상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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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답을 피하도록 알고리즘이 만들어진 결과다. 바닐라는 흰색이므로 흰색으로 표현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대신 ‘블랙’에 더 중요한 가중치를 준다면, 초코 아이스크림도 바닐라가 될 수 있다.

재민이 프로젝트 리더의 세계관은 미국에서 뜨거운 ‘DEI’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DEI는 다양성(Diversity), 평등(Equity), 포용(Inclusion)을 지칭하며, 조직이나 기관 내에서 이러한 원칙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정책과 실천을 의미한다. 백인우월주의는 흑인의 노동착취와 인권 유린에 머물지 않았고 그때 만들어진 시스템이 노예 해방과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후에도 계속 부조리하게 계승되었다는 관점이다. 다양성과 포용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넓어져 히스페닉, 소수민족, 성적 소수자, 트랜스젠더 등 그동안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모든 주체들을 포함하고 있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암묵적인 인종차별을 받으며 유학생활을 마친 나로서도 충분히 머리로, 몸으로 공감할 수 있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본질의 악용과 남용에 있다.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권력과 돈을 위해 본질이 도구가 되는 상황, 심지어 범죄까지도 정당화될 정도로 변질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백인에 대한 역차별을 통해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게 다 백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해결이 되는 웃지못할 상황까지 벌어진다2. 정치권도 득표를 위해 범죄를 앞서서 포용(?)하는 현실이라니, 어디서부터 시작된 왜곡이며 감정을 이용한 본질의 조작인가? 설명이 길었는데 구글 AI의 세계관은 여기서 등장한다. 왜곡된 진실의 폭포 속에, 상식적으로 믿을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재민이의 바닐라 아이스크림 사건은 중요한 기록이 되었다.

물론 아이스크림 가게 얘기만은 아니다. 바티칸도 그렇다. 교황의 이미지를 그려달라는 요청에 재민이는 지금까지 한번도 교황인 적이 없었던 흑인과 심지어 인도계 여성의 얼굴로 답을 대신했다. 더 자세한 설명은 이제 그만 생략하겠다.

이미지 출처: https://twitter.com/IMAO_/status/1760093853430710557

2. 시뮬레이션 세상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백인의 흔적을 없애면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세상이 오는 것인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안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서 미안하다. 디즈니에서도, 아마존 프라임에서도, 백설공주가 흑인이 되고 바이킹의 주인공이 히스페닉 여자가 되고 반지의 제왕 엘프들이 이제 흑인이다. 다양성의 존중인가? 심청이를 백인 남성이 연기하면 편견이 삭제되는가? 아프고 부끄러운 과거도 내 일부인 것처럼 인류의 역사도 인위적으로 왜곡하고 삭제하고 다시 쓸 수가 없다.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의를 방패로 개인과 집단의 이익과 욕구를 취하는 현실은 더 참담하다.

AI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깊게 내려가보면 답은 이미 질문이 갖고 있다. 우리가 이식하는 데이터를 조합하고 학습하여 우리가 만드는 세상을 극대화시키러 가는 중이다. 세상은 공존하는 여러 세계의 합이다. AI는 우리의 세계관을 따라간다. 다만 이번에는 각자의 캡슐이 아니라 데이터의 삭제, 조정, 통제를 통해 전 인류에게 단번에 영향을 미치는 규모와 속도로 시뮬레이션 세상을 구축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실체)과 허구의 경계는 없다.

시뮬레이션 세상3은 새롭지 않다. 이미 참과 거짓, 현실과 상상, 실체와 이미지가 더 이상 구분되어지지 않는, 우리가 가치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온 관계의 실체다. 상징과 기호가 실체를 만드는 미디어 세상에서 극대화된, 사회관계의 실재다. AI는 이 시뮬레이션 세상을 편리하게 하나의 서사로 기록하고 해석하며 우리 스스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참과 거짓, 현실과 상상, 실체와 이미지(상징)가 구분이 안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삭제한다.

AI와 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관, 공존하는 시뮬레이션 세상을 어떻게 읽고 만들어갈 것인가. 이 시뮬레이션 전쟁에서 우리가 진정 당면한 문제다. 전체가 전체와 연결된 세상에서, 더 이상 숨어 있을 공간은 없다. 겉과 속이 같은 것, 있는 그대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구조는 법으로 정치인들이 지정하고 테크 기업들이 따라가는 시늉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직접 사고해야, 내가 생각해야 구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을 인지하는 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제 3막: C군의 정체

1. 생각의 틀

어머니 집에 가면 항상 신문이 있다. 지금은 고구마를 보관하거나 베란다 가드닝을 할 때나 필요한 신문지가 그녀의 집에 가면 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검색 창도 열기 귀찮아지는 시대에 새벽마다 신문이 배달된다. 나는 하나의 신문만 보시는 것은 왜곡된 정보를 수혈하는 결과가 될 수 있어서 그 신문과 반대의 세계관을 가진 신문을 한동안 배달해드렸다. 어머니의 친구들이 보면 경악을 할 일이지만 편견은 편협된 정보의 습득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지 한 사람이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문을 열어두어야 질문할 수 있다. 내가 믿고 있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질문은 생각의 길을 돕는다. 생각이 살아서 여행을 멈추지 않도록 돕는 동반자다.

앞에서 C군이라 불렀던 챗GPT도 여러 시뮬레이션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서비스를 런칭한 Open AI는 비영리 연구조직으로 2015년 설립되었지만 시장에서 더 큰 경쟁력과 투자유치를 위해 2019년 영리 법인으로 전환되었다. 공동 설립자 일론머스크는 Open 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인데, 공공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설립되었으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고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받으며 영리 기업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2. 누가 ‘생각’할 것인가

그런가하면 얼마전에는 CEO 샘알트만이 해고되었다가 직원의 90%가 그를 복직시키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고 이사회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등 대단한 소동이 벌어졌다. X에서 생중계되었던 이 뜨거운 리얼리티쇼는 일주일만에 그의 복직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 소동으로 그의 영향력과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회사는 가던 길을 가고 있지만, 사회적 윤리와 설익은 상업화의 욕망 사이의 갈등이 야기한 사건이라는 논란과 함께,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의문만 남았다. 개인의 권력이든 집단의 이익이든 정보가 불투명한 상태로는 겉과 속이 같은지 다른지 판단은 보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챗GPT에 대한 내 신뢰를 보류하고 객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AI는 만드는 사람의 세계관이 유전자로 반영된 결과물임과 동시에, 이에 참여하는 우리를 통해 자가증식, 자가진화하는 유기체다. 특히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는 우리와 대화하는 형식의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가 주체이고 조력자인지 구분은 불가능하다. 일일이 검색어를 입력하고 원하는 답을 찾을 때까지 내가 주도적으로 인터넷 바다의 문서를 이리저리 헤매고 확인하며 밤새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생성형 AI가 잘 정리해서 주는대로 그안에 머물면 된다. 클릭 한 번도 귀찮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편리하고 똑똑한, 게으름도 나무라지 않는 조력자인가. 그럼 우리는 ‘생각하는’ 귀찮은 일을 이양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답은 질문을 하는 나에게 있다.

1. 생각을 멈춘 우리가 이 악순환의 시작점이다. 2. 우리가 생각을 멈추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AI는 이를 만드는 기업과 이를 규제하는 정부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더욱 쉽고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3. AI가 보여주는 세계를 질문없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순응하는 우리가 학습하는 AI가 만드는 세상을 더욱 강화시킨다. 4. AI가 스스로 학습하며 인간의 지능을 뛰어 넘는 단계가 되면(라면을 사다 주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는 단계) 기업/정부의 통제마저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제 4막: 나

1.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멈춰 서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야할 때가 되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가치는 무엇인가,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능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미 승부는 끝이 나있다. 그래서 AI와의 불필요한 경쟁, AI가 우리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AI는 더 똑똑한 지능으로 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일을 당연히 가져갈 것이고, 우리가 해온 노동을 쓸데없는 일로 만들어줄 것이다. 몸은 편해지고 생각은 멈출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다. ‘나’에 대한 질문, 존재에 대한 질문, 관계에 대한 질문 뿐이다. 앞선 글에서 정리했던 것처럼 존재가 관계 안에 있다. 더 많은 물질을 위해 서로가 서로의 노예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온 시스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한 시스템, 서로를 속이고 과장하더라도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이 똑똑한 일이라고 부추겨온 시스템, 손해를 보는 것은 바보라서 계산하지 않고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인류의 시스템에 대한 질문을 말한다. AI가 함께 하는 세상은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온 관계의 반영일 뿐이다.

이 존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일자리를 잃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존재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위기에 놓여있다. 자유는 내 지능과 내 일을 대신하는 AI가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서로의 자유를 박탈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반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출구가 되어줄 질문을 가졌는가? 지금 전환점이 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생각’하기를 멈춘 우리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지만, 이 상황을 전복시킬 힘도 내게 있다.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기쁘고 설레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가? 무엇이, 왜, 나를 기쁘게 하는가? 질문이 본질로 내려가다 보면 거기, 그 바닥 깊은 곳에는 반드시 생명에 닿게 되어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왜 갈 것인지, 누구와 갈 것인지, 어떻게 갈 것인지가 우리 앞에 놓인 단 하나의 존재적 질문이다. 나에 대한 질문은 관계에 대한 질문, 관계에 대한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 인간에 대한 질문은 가치에 대한 질문, 가치에 대한 질문은 생명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관계가 없이 존재를 설명해낼 방법은 없다.

2. 잃어버린 사랑의 능력

이제 내 오래된 동료와 C군의 이야기로 이 글을 맺음할 때가 되었다. C군에게 사랑의 정의를 물었더니 1초만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사랑은 강렬한 애정과 관심을 느끼는 감정적, 정신적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 관계의 깊이와 풍부함을 나타내며, 종종 가족, 친구, 연인 사이에 발생합니다. 사랑은 상호 존중, 이해, 그리고 돌봄을 기반으로 하며, 때로는 개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경험을 넘어서,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깊은 감정적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놀랍도록 정확한 말인데, 이 안에는 사랑이 없다. C군도, 관계도 없다. 그래서 존재도 없다.

내 오래된 동료에게 사랑의 정의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그냥 주는 것”이라고, 다소 당황스러운 답을 했다. 아니, 손해를 보면 바보인 세상에서 그냥 주다니, 아무리 사랑이라도 댓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준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줬는데”, “내가 얼마나 섭섭한데”, “내 사랑이 얼마나 큰데”,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상처받고 울며불며 하는 말들이다. ‘얼마나’ 많고 큰지 계산하는 관계에 사랑이 있을까? 우리는 사랑마저 계량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인가? 사랑하는 능력을 우리는 살면서 잃어버린 것일까, 원래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일까? 워크숍에서 그녀가 명징하게 찾아냈던 세상의 문제도 떠올랐다. “인색하고 계산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그냥 주고, 그냥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4“. 목적도 계산도 없이, 그것도 주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냥 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니.

그 관계가 무엇이든 이런 마음이 서로 상처를 내고 상처를 입고, 나의 이익의 크기가 가장 커야 하는, 그 크기를 지켜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냥 주다니, 무슨 말인지 깊은 해석이 필요한 이 말에는 그런데 사랑이 있다. 답을 하는 본인이 거기 있다. 그냥 주는 관계 안에 존재가 있다. 동료에 대한 내 신뢰는 지능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존재에 대한 신뢰다. 물병을 집어던지며 싸우던 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왜 알아듣지 못하는지, 왜를 묻다보니 내 동료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보게 된 것은 나였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버릴 수 있는 발견이 이어지고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 안에서 나는 다른 내가 되었다. 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신뢰가 자라났다.

나는 이런 동료를 끝없이 만나기를 바란다. 각자의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 그 존재에 대한 신뢰는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나를 봄으로써, 내 존재를 정의할 수 있게 돕는다.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그 접점, 거기 나의, 우리의 확장이 있다. 서로 연결된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우리’가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AI와 인간의 공생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각자의 진정한 여행을 이끌어가기를 바란다. ‘그냥 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남기는 여운과 질문의 꼬리처럼, 잃어버린 능력에 대해, 우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서로 질문하기를 도와주는, 함께 가는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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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예시: 윤지영, [Why] 인간과 AI: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오가닉 미디어랩, 2024, https://organicmedialab.com/2024/04/25/why-ai-who-am-i/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mail: yun@organicmedialab.com
X (Twitter): @agnesyun
Linkedin: agnesyun


4 thoughts on “[Why]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 (Human vs. AI: Who Am I?)

  1. AI와 인간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풀어가는 글의 깊이가 인상적이네요.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확장이라는 시각이 특히 공감됩니다. AI와 공존하는 미래에서 ‘나’와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해 계속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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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보통은 누가 글을 어떻게 읽고 가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함도 있는데요, 이런 피드백이 도움이 많이 되지요 🙂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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