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먼저 읽고 있던 그녀가 외쳤다. “아니, 이건 러브레터잖아요!” 그랬다. 이 책은 길고 긴 러브레터다. 한 사람을 향한 내 사랑의 고백이다. 힘들어도 힘내라며 말랑하고 달콤한 마쉬멜로우도 없지만, 지금 그대로 충분히 멋지다며 긍정의 힘 북돋는 따뜻한 한마디가 없지만, 당신의 존재만으로 세상이 아름답다며 햇살 눈부시게 빛나는 구절도 없지만, 이 뜨거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지우며 써내려간 러브레터다. 나는 그 한 사람을 기다린다. 세상을 향해 그 한 사람이 써내려갈 러브레터를 기다린다.
나는 고백으로 시작했다. 당신에게 글을 쓰는 내가 누구인지, 부끄러운 과거를 당신에게 고백했다. 7년 전 나의 존재를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때, 시간은 그때 멈추었다. ‘왜’를 만나고,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고백했다. 나를 누르고 있던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의 존재도 처음으로 보았다. 그로부터 풀려나는 경험이 나를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건강, 사랑, 일, 명예 모든 것이 부족한 것 하나 없다고 자족하던 그 때에, 나는 바닥에 닿고서야 건져 올려졌다. 내 영혼이 태어난 날이다.
내 힘으로 얻은 것 중에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 쟁취하러 바쁘게 달려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 내 것이라고 믿었던 능력도, 지식도, 물질도, 소유도, 내가 만든 굴레라는 것을 그전까지 알지 못했다. 선물로 받았던 것들은 다 반납을 해버린 상태였다. 언제나 내 소리를 듣고 내 말을 하느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다. 모든 가치가 오직 관계에 있다면서, 그렇게 네트워크가 중요하고 노드가 아니라 링크라면서 가치가 연결에 있다고 떠들고 가르쳤는데, 정작 나는 알지 못했다. 일이 아닌 삶에서 몸으로 살아내지 않았으니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급해졌다. 내가 본 것을, 내가 세포로 알게 된 것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했다. 당신은 언제나 바쁘다. 그런 당신이 이 긴 글을 읽어줄 시간이 있을까, 중간에 포기하지는 않을까, 끝까지 칭찬 하나 없는 이 사랑의 고백을 다 마칠 수 있게 당신을 멈춰 세울 수 있을까 망설였다. 당신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이미 사방에서 쏟아지는 달콤하고 산뜻한 러브레터를 다 읽을 시간도 없는데, 당신을 더 멋지게 만들어줄 많은 책과 영상, 모임, 강의도 넘쳐나는데. 글을 쓴 시간보다 고민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말해야했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시스템에 순응하며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이대로 가다가는 어떻게 부자로 태어난 당신이 가난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지, 당신이 보지 못하는 가난에 대해 말해주어야 했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존재가, 어쩌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왜곡된 당신이라는 것을 고통스럽지만 말해주어야 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당신의 존재가, 매일 쓰고 살아가는 가면 뒤에서 더욱 소외되어가는 현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당신처럼 순수한 사람에게 가면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을 벌기도 바쁜 당신에게, 이미 당신과 한 몸이 되어버린 존재인 돈이, 어떻게 당신의 모든 사소한 관계를 왜곡하고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돈의 본래 얼굴을, 돈이 가져간 존재의 자유를, 돈이 만든 질서를, 돈의 노예가 된 우리 서로를 볼 수 있도록 나는 전해야 했다. 당신과 나의 잃어버린 존엄성이 돈 안에 있지 않고, 당신과 내가 수단으로 전락시킨 관계 안에, 거기 당신의 자유가 있다고 쓰고 지우고 또 썼다. 당신이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직업에 대해 얘기했던 것도, 직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 직업은 나 자신을 돈의 수단이자 도구가 되게 만들고 대신 스스로 인격화되었다. (…) 거래관계, 경쟁관계, 갑을관계, 지배관계는 인격은 없고 도구가 도구를 만드는 과정의 증거일 뿐이다.” 사실은 일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일하고 먹고 마시고 쉬고 만나고 노는 동안, 당신도 나도 모든 순간을 바쳐 세상의 악순환에 기여하고 있었다. 용서해주기 바란다. 악순환은 진실의 왜곡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보석이 영문도 모른채 아직도 잠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 편지는 당신 안에 얼마나 반짝이는 보석이 있는지, 오직 당신으로부터 발견되기를 평생을 기다리는 그 보석의 존재를 알리려고 쓰게 된 것 같다. 그 보석의 이름은 ‘왜’라고 지었다. 글을 세 개나 할애하고 ‘왜’를 만나러 가는 길을 상세히 적었다.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실체, 당신에게 설레임을 주는 실체, 당신과 세상의 관계를 만드는 뿌리, 당신의 삶을 이끌어줄 나침반, 우리가 다른 여행을 하다가도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 당신을 향해 반짝여서 당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고있는 세상을 향해 반짝이는 보석, 그로 인해 당신의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이 빛으로 드러나는 보석에 대해 알려주어야했다. 그 보석이 당신을 세상의 단 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안에 이미 있다는 것을, 알려야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보석을 발견하게 된다면, 풍요를 위해 달려가던 시간 안에서 당신의 ‘왜’가 난파되지 않도록, 당신이 시작할 항해가 어떤 것인지도, 그 비밀의 시간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주어야 했다. 당신은 여기서 내 편지가 지루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으로는, 그래서 결국 동료들이 서로 도구화되기를 반복하거나, 항해를 시작하기도 전에 불꽃이 꺼져버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테니, 나는 말해주어야했다. 당신의 ‘왜’가 향하고 있는 그 대상을, 그래서 당신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신처럼 반짝이는 ‘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장소, 놓치지 말아야 할 모멘텀, 함께 만들어낼 새로운 시간에 대해 적었다. 전쟁터로 긴급한 전령을 보내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당신은 두렵다고 했다. AI가 당신의 자리를 빼앗을까봐, 당신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갖고 있는 ‘왜’의 마법을 사용하라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당신이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허구와 실제가 구분될 수도 없고 구분될 필요도 없는 세상에서, 당신은 AI를 보고 있지만 나는 당신을 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AI와 당신이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잃어버렸던 당신의 능력, 선물로 받았지만 반납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배우고 훈련할 때가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냥 주고, 그냥 받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디서 찾아와야 할지 당신에게 알리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반지는 없지만 나는 고백해버렸다.
당신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당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왜 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하는지, 질문이 본질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거기, 만나야 할 생명이 있으니까. 생명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자 동시에 답이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오직 관계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 관계가 없이 존재를 설명해낼 방법은 없다는 것을 나는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과 내가 본래 하나의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BCI(뇌-컴퓨터-인터페이스)처럼 이제 생각만으로도 서로를 알 수 있게 된 기술의 발전이, 당신의 뇌, 팔과 다리, 척추, 눈과 귀의 성능이 좋아지는 신체적 확장을 넘어, 당신과 내가 어떻게 존재적으로 연결된 한 몸인지, 서로가 서로의 몸이자 일부인지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존재적인 퇴화를 서로 막아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될 것인지, 서로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돕는 존재가 될 것인지, 숙제로 받았다고 말해주었다. 전체가 하나인데, 한 몸, 한 신체의 일부로서 당신은 이제 무엇이 될 것인지, 시작될 질문을 돕고 싶었다. 무엇을, 왜 연결하는 주체로 살아갈 것인지, 오직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이었다.
나는 긴 편지를 끝내며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었다. 세상이 아픈 이유가, 그래서 당신도 아픈 이유가 다 거짓말 때문이라고 썼다. 우리가 거짓말을 모르는 T족(‘인간의 운명: 거짓말 때문이다’에 등장한 주인공)으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세상이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을텐데, 진실이 왜곡되는 기술은 점점 더 좋아지고 상대방의 믿음이 다시 거짓말의 먹이가 되는 악순환을 처음부터 막을 수 있었을텐데, 억울하지만 당신과 나는 H족으로 태어났고 물러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진실의 지도’를 함께 만들자고, 당신의 ‘왜’가 진실의 지도를 그리는 나침반이 될거라고, 함께 가자고, 함께 살자고, 프로포즈로 편지를 맺음했다. 거짓말이 끝나고 온전히 겉과 속이 같은 나와 당신, 감추고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 그런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나와 당신, 그로부터 왜곡되기 전의 본래의 관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당신과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내 존재는 내 안에 있지 않고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의 존재가 당신 안에 있지 않고, 관계 안에, 끊어지고 깨어지고 상처난 관계 안에 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목적없는 관계, 그냥 주고 그냥 받을 수 있는 능력 안에 사랑이, 그 사랑 안에 당신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익을 계산하느라 너무 바쁜 나와 당신이 다시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된다면, 계산해야 하는 저주에서도 풀려나게 되겠지. 준 적이 없으니 돌려 받을 것도 없고, 준 사람이 없으니 돌려줄 사람도 없겠지. 갖고 태어났지만 시간이 없어서 반납했던 능력,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느라 필요없어졌던 능력, 없어진지도 몰랐던 능력, 그 무한한 능력을 당신이 다시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물론 당신까지 나처럼 극단적이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왜’를 만날 필요는 없으니 걱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했을까? 어떻게든 당신 안에서 자고 있는 ‘왜’를 깨우지 않는 이상, 잃어버린 사랑의 능력을 되찾아올 방법은 없다는 메시지가 당신에게 전해졌을까. 밖에서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말고, 서성이다가 생을 마감하지도 말자고, 시간을 멈추러 함께 가자고. 당신이 ‘왜’를 극명하게 정의하게 되는 순간, 당신이 당신 자신을 만나는 그 찬란한 순간을 나도 목격하고 싶다. 거기서 만난 자유가, 일과 삶이 분리되었던 당신을 하나로 되돌리고 모든 굴레로부터 당신을 구할 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도 생겨나고 자라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 능력으로 서로가 서로의 뇌가 되어주는, 그래서 하나의 뇌가 아니라 수십억의 센서의 역할(1), 서로의 뿌리이자, 조직화되는 개인,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서로를 만들어가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근원에 각자의 ‘왜’가 있는, 그래서 서로의 ‘왜’가 더 강력한 조직화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관계를 통해 숨쉬는 생명 자체이기를 바란다.
긴 편지를 마쳤는데 후련하지 않다. 오랫동안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가 갑자기 말문이 터진 사람처럼, 타다다다, 분노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전심을 다해 쏟아내고 나면, 마침표를 찍으며 다 끝났다고,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아니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하고 긴 사랑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준 당신이 고맙다. 여기, 길 위에서 나는 기다린다. 당신, 단 한 사람의 변화가 세상을 깨울 것이다. 그 한 사람을, 나는 기다린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2024년 5월 9일.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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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스테파노 만쿠소, 식물혁명, 김현주 역, 동아엠앤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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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예시: 윤지영, [Why] 에필로그: 러브레터, 오가닉 미디어랩, 2024, https://organicmedialab.com/2024/05/09/why-epilogue-a-love-letter/
May 9, 2024
Dr. Agnès Yun (윤지영)
Founder & CEO, Organic Media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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